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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인욱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만주학회 만주연구 만주연구 제37호
발행연도
2024.4
수록면
11 - 4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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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란 용어는 거란이 903년에 女直을 정벌했다는 「遼史」의 기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반면 『고려사』에는 948년에 東女眞이라는 표현에서 처음 보인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여진을 동과 서로 구분하였다. 현종대에잠시 고려와 거란의 전쟁으로 인해 야인들의 내투가 많아지면서, 고려가설정했던 여진의 범위를 넘어선 이들의 내부가 이어지게 되었는데, 고려는 이들을 흑수말갈 또는 여진말갈로 표기하였다. 이후 흑수말갈은 동여진으로, 여진말갈은 서여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편의적인 구분이었을 뿐 실제로는 성과 족으로까지 나누어 세세하게 관리했다. 고려는 또 자국의 영향력 내에 존재하는 이들을 화내로, 그 밖의 지역을 화외로 구분하였다. 무산계를 받은 화내인들은 고려에 적대적인 세력에 대한 감시나 방어 또는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간고리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신에 고려는 그들에게 물질적 보상이나 권위를 보장해 줄 수있는 관계 등을 그 대가로 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변경과 가까운 여진인들을 경쟁시켜 힘을 약화시키는 거란이나 금의 지역방어 형태와 차이를보인다. 고려는 여진인들 간의 다툼에는 중립을 지키며, 우호적인 화내여진인에게는 혜택을 주는 방식을 통해, 고려에 적대적인 여진들을 자발적 으로 감시하거나 견제하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이 지역방어 형태는 10세기 완안부 여진이 성장하면서 고려 국경 지역의 여진인들을 흡수하게 되자 붕괴되었다. 고려와 완안부 여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것도이 완충지대가 사라지게 된 것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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