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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병한 (여수순천10·19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9호
발행연도
2024.6
수록면
191 - 23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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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농속회(이하 ‘속회’)는 1939년 6월부터 1941년까지 12월까지 충남예산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비밀결사이다. 무엇보다 속회는 지금까지확인되는 1940년대 충남 예산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활동한 최초의비밀결사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속회의 구성원은 충남 예산 예산교회의 목사 김희운과 교회에 출석하던 예산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예산교회의 산하 5개 가운데하나의 ‘속회’를 표방하면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동지를 모집하는 등의활동을 하였다. 당시 예산교회 목사 김희운의 주도로 임형선․윤영원․최경용․이민구․장준환․김동식․안세영․박대영 등이 조선을 독립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만이 당시 민족차별과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동지획득, 비밀엄수, 조선인다운 정신을 잊지 말 것, 한글을 연구하고 사용할 것, 농민계몽과 농촌경제 충실 등을 정하였다. 이들은독서를 통하여 세계정세 파악하고,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였다. 속회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지향이 없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활동 과정에서 단군 연호나 한글 사용을 주장하고회원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당시 농촌문제에도관심을 기울였다. 속회 중심 인물은 1939년 6월 결성 당시부터 모임을 주도한 김희운과 임형선이었다. 1940년 4월부터 두 사람이 전근과 졸업으로 속회를 떠난 이후에는 장준환과 윤영원이 활동을 주도하였다. 1939년 6월부터 시작된 속회의 활동은 1942년 2월부터 시작된 수원경찰서의 체포로 끝을 맺었다. 1943년 6월 4일 김희운․윤영원․최경용․이민구․장준환․김동식․안세영․박대영 등 8명은 비밀결사 속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부터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를 받고 6월 9일 석방되었다. 속회는 1940년대 전시체제기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도 외부와 연계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결성된 학생운동이자 종교운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특히 속회 회원들은 단순히 독립에 대한 열망만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분명한 사상적 지향이나 독립 이후 새로운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이 부재하였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속회의 존재와 활동은 1940년대 전시체제라는 암울한 현실과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독립과 국권 회복을 갈망하였으며, 실제로 이를 위해 실천하였음을 보여주는 민족운동의 역사적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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