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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지선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48호
발행연도
2024.5
수록면
209 - 263 (55page)
DOI
10.23269/jbs.2024..4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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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오산시 일대는 백제가 충청 이남 방향으로 남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핵심 지역이자 유력한 세력이 입지한 곳이었다. 본고는 화성・오산 동부 내륙 지역의 2~5세기 생활・분묘 유적을 검토하였으며, 백제의 남쪽 방면 진출 전략과 지역 장악력이 강화되는 양상을 고찰하였다. 화성・오산 일대 지역 집단은 하천 유역별로 지역색 유지 여부・위상・백제와의 친연성 측면에서 다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분묘 양상을 통해 볼 때, 황구지천과 발안천 유역은 지역색이 비교적 약했던 반면, 진위천과 오산천 유역은 5세기까지 지역색이 유지되었다. 위세품 등 출토 유물의 위상 측면에서는 진위천과 오산천 유역이 특징적이며, 백제와의 친연성 측면에서는 발안천 유역이 주목된다. 백제는 4세기 이후 취락 재편, 축성, 위세품 사여 등의 방식을 통해 화성・오산 일대를 장악해갔다. 백제 중앙의 물질문화는 발안천 유역의 교통로를 따라 먼저 확산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원삼국시대 이래 진위천 유역과 오산천 유역의 지역 집단에 비해 발안천 유역 지역 집단의 지역색과 통합도가 미약했던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4세기 중엽 이후 백제는 기존의 취락을 재편하고 성곽을 축조하면서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였다. 진위천 유역의 길성리 일대에서는 4세기 중엽 길성리토성이 폐기되고 취락이 확장되었으며, 5세기대에 백제 주도의 축성 작업이 이루어졌다. 소근산성 축조 과정에서 백제는 지역 장악력을 강화하고 경기 남부 지역 교통로와 연결되는 성곽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했다. 오산천 유역에서도 4세기 중엽 이후 백제에 의해 농경・저장에 특화된 중심 취락과 대규모 저장수혈군이 조영되었다. 이를 통해 4세기 중엽부터 오산-화성-평택을 잇는 선이 백제의 교통로로 더욱 활발히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진위천과 오산천 유역에서 취락 재편 현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주요 분묘에서는 위세품류가 부장되었다. 분묘 출토 위세품류에는 중앙 권력에 협조적인 세력을 선택하여 지역 사회 질서를 재조정하고자 한 백제의 의도가 함축되어 있었다. 오산 수청동 유적에서는 5세기 이후부터 대형 주구목관(곽)묘의 전통이 단절되고, 위세품류가 부장된 주요 분묘가 다른 묘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확인된다. 한편 화성 요리 일대에서는 한 고분군에서 복수의 금동관모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묘제, 취락 재편 상황, 금동관모와 공반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요리 고분군 일대에서 출토된 착장용 금공품은 지역 내 최상위 수장의 권위를 표상한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오히려 백제 중앙에 협조한 인물이 받은 대가 혹은 백제가 지역 세력 재편을 위해 활용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화성 지역 출토 금동관모・식리는 백제 위세품의 존재 유무만을 기준으로 지방지배 방식을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제는 4세기 중엽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기존 취락을 재편하거나 거점성을 쌓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지역 집단에 위세품을 사여함으로써 백제 중앙에 유리한 방향으로 집단 내부의 질서를 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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