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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영교 (중원대학교) 김은정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동국사학 제80호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251 - 28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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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ㆍ수렵민이 세운 遼-金-元의 팽창에 맞서 온 것이 고려의 역사였다.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얕봤던 거란인ㆍ여진인ㆍ몽골인이 연이어 세계 제국을 건설했고, 고려를 침공하거나 넘보았다. 10세기에서 13세기를 통하여 고려는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강요당하게 된다. 북방 민족들은 먹고살기 위해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창을 휘둘러 짐승을 잡아야 했다. 그들은 사냥하면서 자연스럽게 단련된 騎馬 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농경 국가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생활 속에서 무예를 단련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고려는 擊毬라는 놀이를 통해 騎槍ㆍ騎射 실력을 높여야 했다. 창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창을 내지르듯이 싸우는 기마술에 있어서 擊毬는 말을 타고 거리를 유지하는 허릿심을 단련할 수 있는 군사훈련이었다. 무엇보다 시위를 당겨 활을 쏘는 것과 毬杖으로 공을 쳐 날리는 것은 같은 메카니즘이다. 騎射와 打球 둘 다 곡사 계통의 기술이며, 투사물의 탄도곡선을 예상하는 감각이다. 북방에서 遼가 쇠락하고 金이 흥기 했다. 고려는 신흥세력의 등장이 가져올 파장을 예상하고 긴장했다. 이전부터 개경 정부는 기병 자원의 보유ㆍ유지를 위해 정기적인 점검을 받은 기수들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주었다. 이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이 나왔다. 국왕이 개최한 神騎軍의 擊毬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경기 후 승률에 따라 포상하였다. 국가의 장려로 그 운동이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 되었다. 개경에 婦女로 구성된 擊毬팀이 생겨날 정도였다. 1116년 여자 선수들이 기마 상태로 뒤엉켜서, 몸싸움하고 서로 공을 차지하려고 毬杖을 휘두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국왕이 거부감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1123년 北宋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문한 徐兢이 고려 기병을 목격하고 이러한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고려에서 우연히 강한 병사[勁卒]를 만났다. 그들은 말방울을 울리며 치닫듯이 달렸다. 등자에 발을 걸고 안장 위에 앉아 말을 모는 것이 예리하면서도 가볍고 용맹하면서도 민첩하였다.’ 고려의 騎兵力은 어느 수준에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1125년에 遼가 멸망하고, 金이 그 영토 전역을 접수하였고, 북중국을 파먹어 들어갔으며, 이듬해인 1126년 정월 河北 磁州(현 邯鄲市)에서 金의 17騎兵이 北宋 보병 2000과 싸워 절반을 사살했다. 17騎는 1명도 죽지 않았다. 11월에 金軍이 北宋의 수도 開封을 함락시키고, 황제와 그 가족과 대신 등 3000을 잡아갔다. 北宋의 멸망이 던진 충격에 고려는 떨었다. 1127년 국제적 긴장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고려는 축제와 같은 행사를 했다. 개경과 서경 兩京이 대결하는 擊毬 대회를 개최했고, 온 나라의 시선이 그 시합에 집중되었다. 왕경 毬庭에서 왕 이하 수많은 관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두 도시의 神騎가 격돌했다. 기록이 소략하여 참가 선수들의 이름, 승패 등은 알 수 없지만, 기존부터 있었던 兩京 간의 경쟁심을 더욱 상승시킨 것이 확실하다. 仁宗은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를 騎兵力 상승으로 전환하려 했다. 경기가 끝나고 왕이 선수들에게 상금을 내렸다. 『高麗史』를 보면 군인들이 神騎에 들어가기 위해 좋은 말과 호화로운 마구를 자비로 마련한 기록이 보인다. 神騎軍이 되어 국왕이 관전하는 擊毬 경기에서 선수로 뛰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다. 스포츠는 출세의 사다리이기도 했다. 擊毬에 중독되어 있던 毅宗은 그 운동에 뛰어난 武臣들을 총애했다. 鄭仲夫와 慶大升 등을 비롯한 고려 武臣政權 내부에 적지 않은 유력인사들이 毅宗 휘하의 擊毬 선수 출신이었다. 擊毬가 고려정치사에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남긴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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