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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지관순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백영서
발행연도
2013
저작권
연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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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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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문학에서 사학으로 학문 전향을 한 이래 왕국유는 양계초(梁啓超)와 함께 중국의 근대사학을 정립한 학자이자 ‘학문을 위한 학문’, ‘순수학문의 지향’을 주창한 학자로 정의되어 왔다. 또한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사학대사(史學大師), 또는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는 왕국유가 서양의 과학적 학문방법과 중국의 고증학적 학문방법을 결합해 이중증거법을 만들었고, 이것을 고대사에 연구에 적용하여 중국고고학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유는 ‘현실 비참여적 지식인’, ‘비정치적인 학자’ 또는 ‘순수학문’만을 주창한 학자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1911년 이래 학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1919년 전후의 중국의 대내외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정치적 견해도 가지고 있었다.
왕국유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하였는데, 그의 정치적 견해가 드러난 것은 후자인 사적영역에서였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당시가 5.4운동기, 즉 혼란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왕국유가 혼란기 지식인이 갖는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와 비정치의 경계에 걸쳐있는 그의 행동을 ‘비정치에 의한 정치적 행동’이라 보았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는 ‘국가활동에 전반적인 참여’이며, 따라서 왕국유가 상소를 통해 국정에 대한 논의 및 제안을 한 것 역시 정치적 행동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왕국유의 ‘비정치에 의한 정치적 행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1924년 이래 왕국유가 부의에게 제출한 ??대신의 사리(事理)가 명확하지 않음을 탄핵하는 상소(劾大臣不明事理疏)??, ??정학(政學)을 논하는 상소원고(論政學疏稿)??, ??삼가 소견을 아뢰는 접(敬陳管見摺)??, ??황실박물관 건립을 아뢰는 접(籌建皇室博物館摺)??, 이 네 건의 상소이다. 그 중에서도 1924년 부의에게 올린 상소인 ?정학(政學)을 논하는 상소원고(論政學疏稿)?에서는 중국의 국내외 상황을 언급함과 동시에, 국정과 지도자가 나아가야할 방향도 제시하고 있었다.
왕국유의 역사 연구 역시 그의 정치적 행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예로 왕국유는 역사연구를 통해 고대의 이상적인 사회라 평가받는 은주시대를 연구하여 중화전통의 기반을 찾고자 했다. 왕국유는 당시 중국이 아무리 혼란한 시기일 지라도 앞으로의 중국의 문명과 사상 및 학술이 잘 보존되고, 이 속에서 황제의 체제가 다시 잘 유지 될 수 있다면 백성의 고통과 사회문제 역시 해결될 것이라 보았다. 이 외에도 왕국유는 중국문화의 정신 및 중국의 문화가 세계 2차 대전 이후의 서양문화의 몰락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라고 단언했다. 더 나아가 왕국유는 중국문화의 부활 및 정수를 이끌어갈 존재로 ‘황제’를 상정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왕국유는 부의에게 황제 실질적인 권력을 추구하기보다 학문의 관장자로 있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는 왕국유가 상소를 통해 황제에게 선진시대의 교육제도인 ‘육예(六藝)’를 공부할 것을 권하는 데서 드러난다. 왕국유는 고대 중국의 문화 및 보편적인 학문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매개가 육예이며, 이러한 고대 공학(公學) 및 문화를 관장할 수 있는 존재가 황제라고 보았다. 더욱이 왕국유는 이를 기반으로 역사고고학센터를 설립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왕국유는 역사고고학센터를 통해 중화문화 및 문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후세에 전달하는 학문관리자의 역할을 자임하여, 중화문화의 부활 및 부흥에 일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왕국유가 역사연구를 하고 황제를 상징적으로나마 보존하면서까지 추구한 궁극적인 지향점은 학문의 보전을 통한 중화문화의 근대적인 부활을 원망(願望)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왕국유는 학술과 중화문물의 보전을 통한 중국문화의 새로운 계승 및 부활이라는 거시적이고 장기지속적인 과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유의 지향은 1932년 건립된 만주국 정부가 유교를 공식이념으로 채택하고 유교의 왕도정신을 표방한 것과 그 맥락이 닿아 있었다.
그러나 왕국유의 지향, 즉 황제를 학문의 관장자로 세우고 자신은 학문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해 중화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한 바람은 현실에서 실행되지 못했다. 그가 중화문물을 보존하기 위해 했던 모든 논의들은 1924년 풍옥상(馮玉祥)에 의해 부의가 자금성에서 강제로 출궁을 당하면서 실현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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