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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김철민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박대재
발행연도
2014
저작권
고려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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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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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구려 장수왕대에 남조에 존속한 국가였던 송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고구려와 송과의 관계를 시기구분 하였는데 고구려의 송에 대한 사절 파견의 중단과 재개를 기준으로 하면 3시기로 나눌 수 있으며 송이 약세화로 접어드는 45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하면 고구려의 대송관계를 크게 전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사절 파견의 양상으로 구분한 고구려의 대송관계 1?2期는 전기에 해당하며 3期는 후기에 해당한다.
장수왕은 즉위 직후 동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는 기존의 고구려의 외교노선과 다른 이색적인 행보였다. 413년의 이 외교활동을 통해 동진으로부터 樂浪公, 그리고 동진이 백제왕에게 수여한 鎭東將軍보다 상위의 장군호인 征東將軍을 얻어내었다. 장수왕 즉위 초기 이 같은 대동진외교는 광개토왕의 죽음 이후 약화될 수 있었던 왕권의 고양에도 도움이 되었으리라 보았으며 낙랑공이라는 작호를 동진에게서 인정받게 되어 훗날의 평양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았다.
한편 420년 동진의 권력자였던 劉裕는 송을 건국하였고, 동진의 책봉을 받은 나라의 군주들에 대하여 장군호 승급을 행하였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그 대상이었다.
송은 건국 후 북위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북위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역할에 주목하였고, 고구려도 역시 북위에 대한 견제나 대백제포위라는 외교적인 전략을 위해 대송외교를 구사하였다. 대송관계 1期에 해당하는 423년과 424년의 고구려의 대송외교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뒤이은 백제의 대송외교 실시와 송의 백제에 대한 우호적 자세로 인하여 고구려는 424년 이후 송으로의 사절 파견을 한동안 중단한다. 이리하여 대송관계 1期는 마감되었다. 송에 대한 사절 파견 중단 시기에 고구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는데 본고에서는 그 천도의 이유와 관련하여 군사방어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백제의 청병외교가 성공할 경우 송에 대한 대비와 백제에 대한 압박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 후 436년 고구려가 다시 송과의 외교를 재개하면서 고구려의 대송관계 2期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다시 시작된 고구려의 대송외교는 북위와 고구려의 갈등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장수왕은 당시 고구려의 서방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있었으므로 송과 북위에 대한 양면외교를 통하여 남북조 사이 역관계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전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와 송의 관계는 438년 북연의 군주였던 馮弘의 망명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풍홍 사건이 벌어진 직후 송은 마침 사절을 보내온 왜왕 珍을 安東將軍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장수왕에게 송이 왜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할 수도 있다는 이이제이 전략으로 비춰졌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대송관계 1期와는 달리 송의 이러한 자세에 대해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이 무렵에 고구려와 북위가 긴장된 상태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송과 갈등 관계가 생기더라도 이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나 왜가 고구려를 견제하는 대송외교를 취하는 것에 대해 고구려도 같이 송에 사절을 파견하여 송의 의중을 탐색하고 백제?왜의 고구려 견제를 무마하려는 외교를 펼친 것으로 이해하였다.
대송관계 2期는 고구려, 백제, 왜가 동시에 사절을 파견하는 해인 443년까지로 보았는데 그 후 8년간 고구려 사절의 대송 사절 파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대송관계 3期의 시작은 고구려의 송에 대한 군마 지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송서』 고구려전에는 송의 북벌에 대한 고구려의 군마 지원이 원가 16년(439)으로 기록되었는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연도를 신빙하여 고구려의 대북위외교의 중단과 연관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송이 북벌을 추진한 시기는 당시의 국제정황과 비교해 볼 때 기실 원가 26년(449)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원가 16년이라고 기록된 것은 26년의 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50년대 초반의 백제와 왜의 일정한 대송외교의 성공의 배경을 원가 26년(449) 장수왕이 송의 북벌에 대해서 미온적으로 군마 지원을 하였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이에 송은 450년대 초 백제나 왜의 대송외교에 대해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腰弩 등의 신무기나 왜가 자청한 한반도 남부지역의 도독제군사호 등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대송관계 3期는 450년대 초반 이후로 이 시기 고구려 장수왕은 평균 2~3년에 한 번씩 대송외교를 진행하였다. 이때도 백제, 왜의 대송외교와 비슷한 시점에 고구려의 사절이 파견된다.
그렇지만 462년 고구려가 북위와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장수왕의 대중국 兩端外交가 시작되자 송은 이러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 개선에 대처하고자 463년 장수왕을 開府儀同三司로 삼고 車騎大將軍으로 장군호를 승급하는 등 고구려와의 관계를 더욱 우호적으로 지속하려 하였다.
이런 이유에 더하여 대송관계 3期에는 송이 산동반도를 상실하는 등 송의 약세화가 두드러져 백제나 왜의 대송외교를 통한 고구려 견제책은 더 이상 효력을 잃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백제의 경우는 외교 상대를 바꿔 북위에게 청병외교를 하였으며, 왜는 462년 이후 15년 동안 대송사절을 중단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고구려 장수왕이 송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지속적으로 송에 사절을 보내고 때때로 단절한 배경에는 백제?왜의 대송외교가 하나의 이유로써 논의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1
Ⅱ. 장수왕의 즉위와 對東晋外交 7
Ⅲ. 장수왕대 前期 對宋關係 14
1. 宋과의 관계 성립과 平壤遷都 14
2. 馮弘을 둘러싼 宋과의 갈등과 百濟?倭의 對宋外交 24
Ⅳ. 장수왕대 後期 對宋關係 31
1. 宋으로의 軍馬 지원과 百濟?倭의 對宋外交 31
2. 百濟?倭의 對宋外交에 대한 高句麗의 대응 36
Ⅴ. 맺음말 42
參考文獻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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