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의 러시아어 창작 말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에 발표된 많은 단편 소설들은 속악한 일상으로부터 창조의 세계로 도약하는 영감의 순간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나 강제적인 일상의 규범 때문에 창조적 무능력내지는 무기력에 빠져있던 예술가-등장인물들은 문득 찾아오는 창조의 순간에 피조물로부터 창조자의 위치로 도약한다. 본 논문은 단편 선집 『피알타의 봄』의 표제작 「피알타의 봄」과 그 밖의 작품 속에서 구현된 창조적 영감의 순간의 미학적인 구성에 대해 다룬다. 이 순간에 등장인물-예술가는 외부 세계에 나타난 우연한 사물의 배열을 포착해내며, 그로부터 세계의 질서를 재배열하는 창조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의식 세계를 굽은 거울처럼 활용한다. 외부 세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유한 기억들에 비추어 굴절된 채로 받아들여진다. 주체의 내면적 중력에 의해 사물들은 본래 속했던 의미의 장에서 풀려 나오며 주관적인 연상의 원리에 따라 재배치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을 기억-몽타주 작업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들의 고유한 목록을 기억-몽타주의 일환으로 고찰한다. 목록화란 서로 전혀 다른 조건 속에 놓여 있었던 동일하지 않은 개체들을 강제로 한 곳에 불러 모으는 작업이다. 하나의 목록에 묶인 개체들은 자신들의 맥락과 역사를 강탈 당한 채 초월적인 누군가의 방향 설정에 따라 임의로 재구성된다. 기억의 재료들을 재구성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창조의 세계의 반대편에는 기억력의 결핍 위에 세워진 저속한 세계가 있다. 기억하지 않는 창조자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지만 그로부터 고유의 창조로 나가지 못한다. 외부 세계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는 세계는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고 무리 없이 동의될 수 있는 나태한 낙관주의로 귀결된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작품 속에 몰개성을 지향하는 저속한 시를 삽입함으로써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창조의 순간과 비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