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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박민경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김영하
발행연도
2015
저작권
성균관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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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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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6~7세기 백제의 대왜관계 양상을 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각 국의 내정과의 상호 연동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양국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대체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소원 ? 단절 ? 동맹의 재구축 등의 부침을 겪었다. 이는 자국의 정치상황 및 주변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연동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대왜관계는 4세기 近肖古王代에 처음 통교하였으며, 4세기 말에 고구려가 공격해오자 왜국과 군사외교를 추진하였다. 毗有王代에는 왕녀를 보내 혼인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다. 蓋鹵王은 왕녀의 파견을 중단하고 王弟인 昆支를 파견하였다. 昆支의 파견목적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한 군사협력 관계의 추진과 한반도의 국가들에 대하여 제군사호를 요청하는 왜국의 대송외교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昆支의 아들인 牟大는 東城王으로 즉위하였다. 東城王은 왜국과의 관계보다는 신라와 남제와의 관계에 집중하였다. 그 이면에는 雄略天皇이 사망하고 새로운 王系인 繼體天皇이 즉위하기까지 30여 년간 4명의 천황이 교체될 정도로 불안정한 왜국의 정치상황이 있었다. 武寧王은 남부 가야 지역으로의 영역확대를 도모하고자 가야 제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왜국을 끌어 들여 호혜적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는 백제가 선진문물을 제공하면 왜국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백제는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己汶 지역을 장악하여 남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聖王 역시 武寧王代의 정책을 계승하여 안라의 주변부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신라 역시 南加羅와 ?己呑 등을 병합하고 낙동강 以西로의 진출을 도모하자, 안라는 자국의 존립과 가야 제국의 안전을 위해 왜국의 사신을 중재자로 하여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각 국의 이해관계만을 확인한 채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왜국의 이중외교정책이었다. 왜국은 백제와 호혜적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라가 중재 역할을 제안하자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 왜국이 안라의 제안을 수용한 것은 왜국 내부에서 백제 일변도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낙동강 이서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움직임도 주시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聖王은 남부 가야 지역을 둘러싼 신라와의 항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대고구려전에 전념하기 위해 왜국의 이중외교정책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였고, 왜국은 결과적으로 그 어떠한 실리도 얻지 못하자 다시 친백제노선으로 회귀하였다. 聖王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였으나 바로 신라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이에 聖王은 왜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백제는 왜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는 대신 왜가 요구한 선진문물 등을 보냈다. 왜국이 지원한 군수물자가 얼마나 백제의 군사력에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군수물자의 양이 비교적 적은 것으로 보아 실질적인 군사력 보강 측면보다는 대외적인 가시효과, 즉 왜국이 백제의 지원군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시위 효과를 얻어 擴戰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聖王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후 즉위한 威德王에게 부여된 과제는 백제 사회와 왕권의 안정이었다. 威德王은 왕권이 안정되자 중국과의 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백제가 중국 남북조 국가와의 교섭에 집중하는 동안 고구려와 신라는 왜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왜국 교섭은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자구책이었으며, 신라의 왜국 교섭은 후방에서의 지원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에 백제 역시 575년에 왜국과 교섭을 재개하였다.
武王代에 들어오자 왜국과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였으며, 삼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당과의 관계를 추진하였다. 이는 당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제는 현실적 위협 대상으로 부상한 신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義慈王은 642년에 정변을 단행하여 翹岐 등 왕족과 귀족세력 등을 추방하였다. 추방된 세력은 왜국으로 망명하여 당시 정치적 실권자였던 蘇我氏 세력과 결탁하였다. 蘇我氏가 이들을 받아들인 까닭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여파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던 양국 관계는 또 다시 냉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백제는 당과 관계를 단절하고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자 당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당은 백제를 적국화하고 신라와 군사동맹을 確約한 후였다. 이에 백제는 왜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653년 通好하였고 백제-왜-고구려를 잇는 남북 군사동맹 체제를 형성하였다.
660년에 백제는 나당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지만 얼마 안 있어 백제 고토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부흥운동 세력은 구원군 및 군수물자를 왜국에 요청하였다. 왜국은 백제의 부흥이야말로 곧 자국의 안보와 직결됨을 인식하여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왜국의 참전으로 인해 백제의 부흥운동은 一國의 재건문제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전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는데, 白江 전투에서 당의 수군에 대패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이상으로 6~7세기 백제의 대왜관계를 살펴보았다. 양국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관계를 형성하여 오랜 친연관계를 형성해 왔다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각 국의 내정과 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따라 연동되었으며,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과 실리의 향방에 따라 관계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란 정치적 상하관계나 종속원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자국을 위한 쌍방의 노력과 반대급부의 향유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양국은 관계의 浮沈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차

목 차
서 론
1. 연구목적
2. 선행 연구의 검토
3. 연구 방법과 내용
Ⅰ. 5~6세기 전반의 대왜관계 양상
1. 5세기 대왜관계의 추이
1) 대왜관계의 형성과 昆支의 파견
2) 東城王의 즉위와 대왜관계의 냉각
2. 武寧王代 대왜관계의 재정립
1) 대고구려전 공세와 대왜관계의 재정립
2) 가야 지역 진출과 우호관계의 수립
3. 聖王代 대왜 군사협력체제의 가동
1) 帶沙 지역의 장악과 안라의 대응
2) ‘任那復建會議’의 개최와 대왜정책
3) 관산성 전투와 대왜 군사협력관계 수립
Ⅱ. 6세기 중반~7세기 전반 삼국의 각축과 대왜관계의 양상
1. 威德王代 대왜관계의 변화
1) 대왜관계의 소원화와 왕권강화 정책
2) 麗?羅의 대왜 접근책과 대왜관계의 재개
3) 문물 전수의 재개와 우호관계 재정립
2. 武王代 대왜관계의 냉각
1) 武王의 對隋外交와 麗?羅의 견제
2) 隋 서찰 탈취사건과 대왜관계의 냉각
Ⅲ. 7세기 중반 국제정세의 변화와 대왜관계의 재구축
1. 당의 등장과 국제정세의 변화
1) 당의 등장과 대왜관계의 모색
2) 왕자 豊璋의 파견
2. 義慈王代 대왜 동맹외교의 재구축
1) 친위정변과 대왜관계의 냉각
2) 대당외교의 추이와 왜국과의 ‘通好’체결
3. 백제 멸망과 왜국의 구원군 파견
1) 백제부흥운동과 扶餘豊의 귀국
2) 왜국의 구원군 파견과 白江 전투
결 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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