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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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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남혜민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발행연도
2017
저작권
연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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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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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韓傳과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3세기 삼한을 기록한 史書지만 중심 소국의 존재 양상을 두고 해석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따르면, 3세기에 진한의 사로국?마한의 백제국과 같은 중심 소국이 등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삼국지』 韓傳에서는 삼한 소국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으며 중심 소국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지 않다. 이에 기존 학계에서는 『삼국지』 韓傳에 근거하여 3세기 중후반까지 삼한 소국들이 대등하고 병렬적으로 존재하였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나아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삼국지』 韓傳과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상충된다고 이해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내용?연도를 수정하는 연구가 주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삼국지』 韓傳에 제시된 소국들이 단순히 평등하고 병렬적으로 존재하였다고 파악할 것이 아니라 소국 규모의 우열과 차등화된 수장의 호칭에 대한 기록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본 논문은 『삼국지』 韓傳을 중심으로 3세기 삼한 소국 네트워크의 존재 양상을 고찰하였다. 나아가 진한에서도 사로국을 宗主國으로 하여 여러 소국들이 위계를 가지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삼국지』 韓傳에 따르면, 삼한에는 大國부터 小國까지 다양한 규모의 정치체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인의 자체적인 분류가 아니라 중국 군현의 관리자?교역 종사자들에 의해 삼한 현지의 사정이 기록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즉 國 규모의 구분은 삼한 소국들 사이에서 스스로 인지한 차이였다. 나아가 大國과 小國의 구분은 삼한 소국들이 상호 간의 우열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삼한 소국들이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대등하게 공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국의 지배층 중에서 몇몇 소국의 臣智는 우월한 호칭을 가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정치체의 규모에 따라 소국 지배자의 호칭에는 차등이 있었다. 이를 통해 삼한 소국의 지배층은 상호 간의 위계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우열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曹魏 왕조에서 삼한 소국의 지배자들에게 歸義侯부터 伯長까지 다양한 印章(官印)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인수의 서열?등급은 중국인의 자체적인 판단이 아니라 현지의 서열 관계에 따라 하사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를 통해 3세기 삼한 소국은 大國을 중심으로 서열화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삼국지』 韓傳에서는 진한의 사로국이나 마한의 백제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 3세기 고고학 자료를 고려하면, 사로국의 규모는 진한의 大國으로 상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진한?변한 24국의 열거 방식은 여러 교통로를 중심으로 소국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진한의 사로국은 진한 지역과 濊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특히 2세기 사로국은 濊지역으로 가는 교통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한과 濊 사이의 교통로를 중심으로 결합된 소국群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韓傳에 진한 大國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는 일부 大國이 교통로의 거점에 있었던 것에 비해 진한이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러 소국들이 병립하면서 서로를 동등하게 인식할 만큼 대등하게 공존하였을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2세기 사로국이 음즙벌국과 실직국의 강역 문제에 개입하면서 사로국과 주변 소국 간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였다. 이후 사로국은 무력을 통해 주변 소국들을 복속하였고 진한 소국 네트워크는 사로국을 정점으로 하는 교역 관할 범위를 확대하였다. 특히 3세기 사로국은 浦上八國의 공격을 받은 변진의 구야국에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사로국의 교역 관할 범위는 동해안 일부에서 동남해안으로 확대할 수 있었으며 대등하였던 구야국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우위로 성장하였다.
즉 『삼국지』 韓傳에서 진한이 6국에서 12국으로 분화하였다는 기록은 단순히 중국 군현의 교섭국이 증가하였다기보다 구체적으로 사로국이 관할하는 교섭국의 증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3세기 후반에는 사로국이 진한과 변한의 교역을 관장하면서 『晉書』에서 ‘辰韓王’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지』 韓傳에서 삼한 소국들은 大國을 중심으로 서열화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삼국지』 韓傳에 기록된 진한의 존재 양상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3세기 사로국 및 주변 소국의 존재 양상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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