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士 安建榮(健榮, 1841-1877)은 조선 말기에 뛰어난 기량으로 다양한 화목을 그린 화원화가이다. 그의 높은 수준은 ??槿域書畵徵??에서 “도화서의 뛰어난 솜씨는 장승업과 안건영에 이르러 그쳤다.”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가와는 반대로 현존 작품이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李龜烈은 ??近代韓國美術의 展開??에서 안건영을 “완전히 잊혀 사라진 역사 기록 속의 화가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근래에 들어 발표된 몇 편의 논문과 새로운 작품의 발견에 힘입어 그는 역사 기록 속의 화원이 아니라 조선 말기의 중요한 화원으로 주목되고 있다. 이 논문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안건영의 畵員活動, 交遊關係, 繪?世界, 畵壇내 위치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안건영은 37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夭折하였다. 그 때문인지 안건영의 화원활동, 교유관계, 회화세계 등 알려진 것이 적으며 그마저도 오류가 많다. 안건영의 생애는 그동안 1841-1876년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 논문을 통해 그의 생애가 1841-1877년이었음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에서 高宗御眞圖寫나 祿取才에 같이 참여하였던 화원 등을 통해 짐작하였던 안건영의 교유관계를 본고에서는 그의 친척 安中植(1861-1919)과의 관계를 뼈대로 삼고 안건영의 교유관계를 확대해 살펴보았다. 이 밖에 안건영의 작품에 남아있는 印章과 書體를 통해서도 그의 교유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안건영의 작품에는 李尙迪(1804-1865), 丁學敎(1832-1914) 등의 인장과 정학교, 안중식의 서체가 발견되고 있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더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이전까지 北宗院體的 傾向으로 알려진 안건영의 작품을 다각화시키고 그 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안건영의 산수화는 청대 정통파 화풍과 畵譜의 영향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인물화에서는 채색인물화로만 알려진 작품 외에도 김홍도풍의 인물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조화에서는 김홍도의 화조화풍과 청대 운수평 화풍 그리고 화보의 영향이 여러 양상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안건영은 그동안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그가 조선 말기 화단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논의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그가 화단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시기, 화단의 흐름, 사제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안건영은 시기적으로 조희룡의 사후부터 장승업의 본격적 활동 시기 이전에 위치하고 있다. 안건영이 시기상 장승업 이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화단의 흐름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짐작에서 더 나아가 본고에서는 안건영이 활동한 1860년대 후반에서 1870년대 후반까지의 화단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안건영을 통해 본 1860년대 후반에서 1870년대 후반까지의 화단의 흐름은 화보의 의존성이 증대하였고, 서화 수요의 증대에 따라 성행 소재 또는 장식적 경향이 화단에 만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 화풍은 청대 북경에서 강남으로까지 유입의 폭이 증대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같은 화단의 흐름은 1880년대의 장승업에 이르러서 지속·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사제관계상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자부 증언 중 ‘안중식이 어린 시절 안건영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언급이다. 이는 장승업-안중식-근대화단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안건영이 추가되는 것으로 사제관계상 그가 화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안건영과 안중식을 완전한 사제관계로 보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많으며, 이 둘 사이의 화풍 관계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영향 관계로 확인된다. 위의 세 가지 측면을 살펴보면서, 그 과정에서 안건영의 독창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이는 그가 독자적 회화세계를 이루기 전에 夭折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독창성이 부족하여 아쉬움이 남으나 안건영은 당시 화단의 시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안건영을 통해 장승업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 즉 1860년대 후반에서 1870년대 후반의 화단까지의 흐름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점은 조선 말기 회화사에서 그가 가진 중요한 의의라 할 수 있다.
An Geon-yeong(安建榮 or 安健榮, 1841-1877) was a highly skilled government artist of the late Joseon Dynasty who produced paintings on a variety of themes. Geunyeok seohwajing(槿域書畵徵, “Dictionary of Korean Calligraphers and Painters”) maintains “Chang S?ng-?p(張承業) and An Geon-yeong were the last outstanding artists at the Bureau of Painting.” But despite this assessment, An remains largely unknown because hardly any of his works survive. Recently, however, several studies and newly discovered works by An have brought him new attention as an important government artist of the late Joseon period. This study is a comprehensive investigation of An as a late-Joseon artist. An died at the relatively young age of 37. Perhaps because of this, little is known about his life, his social relationships or his oeuvre. Even among the little information available about An, much is wrong. Until now, he was thought to have lived from 1841 to 1876, but this study has established that he actually lived from 1841 to 1877. Moreover, I have attempted to understand An''s works, previously thought to embody “Academy”-style tendencies, from a greater variety of perspectives. An''s landscape paintings can be divided into Painting Manuals and works in Qing Orthodox School style. His portraits, in addition to the colored figure paintings for which he was already known, also include works in the style of Kim Hong-do(金弘道). Meanwhile, An''s flower-bird paintings show influence from the styles of Kim Hong-do and Qing artist Yun Shouping(?壽平), as well as of the Painting Manuals style. An has remained largely unknown to the general public until now. As such, there has been no discussion of his status as a painter in the late Joseon period. This study examines aspects such as period, painting trends and teacher-student relationships in order to determine An''s status as a painter. While examining An Geon-yeong''s status among late-Joseon painters, it was not possible to find any original aspects to his work. This appears to be because he died before he could develop his own independent painting oeuvre. Though his lack of originality is regrettable, An Geon-yeong is considered meaningful in that his work demonstrates the character of late-Joseon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