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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정현주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백승충
발행연도
2018
저작권
부산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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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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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외 팽창 정책은 백제의 쇠퇴를 불러왔고 가야 소국 중 하나였던 가라국은 그 틈을 노려 대외적인 팽창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백제의 쇠락으로 인해 힘의 공백이 생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동부지역에 세력을 미친 가라국은 이 지역의 주요 수계인 섬진강로를 통해 중국의 南齊에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남제에 의한 책봉은 가라국의 성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대사건이었으며 소위 ‘대가야 연맹’의 성립을 가능케 하였다.
한편, 가라국의 진출로 그 영향 아래에 들게 된 ‘임나 4현’과 대사는 지금의 전라남도 동부지역과 경상남도 하동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모두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가라국의 대외 교섭을 지지하고 도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대사의 경우, 가라국의 유일한 기항지로 기능하게 되면서 ‘임나 4현’ 등 주변 지역을 통솔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사는 ‘대사국’으로 발전하여 ‘대가야 연맹’의 주요국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가라국의 성장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백제는 동성왕 시기를 거치면서 대내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대산성 전투’를 통해 ‘대가야 연맹’의 주요국이었던 기문에 타격을 줄 수 있었으며, 이후 영산강 유역에 대한 재정복을 통해 대외적인 팽창에 나서기도 하였다. 동성왕 이후 집권한 무령왕은 더 적극적인 대외 공략에 나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섬진강 유역에 대한 공격이었다.
백제는 먼저 ‘임나 4현’ 지역을 공략하여 손쉽게 성공했다. ‘임나 4현’의 수장층들은 대사의 수장층보다 세력이 떨어지지 않음에도 그 하위 집단으로 들어가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백제에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는 기문을 지배하고 이어 대사를 공격하였으나 쉽게 얻지 못한다. 가라국은 백제의 위협으로 유일한 기항지인 대사가 위험해지자 이미 ‘임나 4현’의 이탈로 세력이 줄어든 ‘대사국’을 해체하고 다사진으로 격하시켰다. 대규모의 축성을 통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한 가라국이었지만 결국 529년을 기점으로 대사를 백제에 빼앗기고 만다.
백제의 섬진강 유역 확보는 가라국의 성장을 정체에 들게 했고, 이후 가라국은 수세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섬진강 유역을 바탕으로 경남 서부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나설 수 있었다. 섬진강 유역의 재지 수장층들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든 후 백제의 지방 제도에 포함되어 사라져갔다. 가라국과 백제의 섬진강 유역 쟁탈은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던 섬진강 유역 세력들을 와해시킨 대사건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1
Ⅱ. 5세기 전·중반 가라국과 백제의 동향 4
Ⅲ. 5세기 후반 가라국의 섬진강 유역 진출과 섬진강 유역 집단 10
1. 섬진강 유역 집단의 동향 10
2. 가라국의 섬진강 유역 진출 17
Ⅳ. 6세기 전반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 23
1.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 배경 23
2. 가라국의 ‘임나 4현’, 대사 상실 27
Ⅴ. 가라국의 섬진강 유역 상실과 그 영향 34
Ⅵ. 맺음말 38
참고문헌 40
Abstract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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