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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김영선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여인성
발행연도
2019
저작권
연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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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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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태권도의 원류,‘오대관’의
형성과 사적(史的) 의의에 관한 연구

이 연구의 목적은 광복과 더불어 형성된 오대관을 현대 태권도의 원류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명확한 사실(史實)을 파악함으로써 태권도사에 관해서 유용한 지식을 확립하는 것이다. 아울러‘오대관’의 형성과 발달이 태권도 사적(史的) 관점에서 어떠한 의의(意義)를 갖았는지도 고찰함으로써 태권도 정체성 확립에 일조하는 것이다. 세부적 연구 문제는 첫째, 오대관의 무예 명칭 둘째, 오대관의 형성 시기 셋째, 오대관의 발달 과정 넷째, 오대관의 사적(史的) 의의 등이다.
연구 방법으로는 역사적 연구법과 면접 조사법이 채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3단계의 연구 절차로 진행되었다. 첫째, 선행 연구와 이론적 배경이 고찰되었다. 둘째, 주제에 관한 신문기사 102건, 사진 29점, 증서 4점 등 총 134건(점)의 1차 사료가 수집되었다. 셋째, 수집된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각 주제와 관련된 선행 연구와 기록들과 비교 분석되고 논의되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도출되었다.
첫 번째 주제인‘오대관의 무예 명칭’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청도관은 창설자 이원국에 의해‘당수도(唐手道)’란 명칭이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조선연무관에서는 창설자 전상섭에 의해 개관 초기에는‘당수(唐手)’란 무예명이 채용되었다. 이 당수 명칭은 개관된 지 1년 6개월 후에‘권법’으로 개칭되어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무덕관은 시초에는 청도관과 조선연무관의 영향으로‘당수도’란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1949년에 5월 이르러 화랑도의‘화(花)’글자를 도입하여‘화수도(花手道)’란 독자적인 명칭으로 바꾸었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즉 YMCA에서는 창설자 윤병인에 의해‘권법’이 그리고 송무관은‘당수도’가 무예 명칭으로 채택되었다. 한편 오대관 창설자의 무예 경력이 여러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은 한 신문에서 전 일본 주오(中央)대학 사범으로 활동했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그 사실적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여겨진다. 또한 조선연무관 권법부 창설자 전상섭은“일본 토요(東洋)대학, 센슈(專修)대학, 와세다(早稱田)대학 공수부에서 다년간 사범으로 있었다.”라고 지방의 한 신문에 명기되었지만 이 또한 신뢰하기 어렵다. 전상섭의 나이 20세에 조선연무관에서 1급을 딴 유도 경력이 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YMCA 권법부 창설자 윤병인은 슈토칸(修道館) 4단과 전 니혼(日本)대학 당수부 사범이 아니라 주장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은 일본 쇼오토오칸(松濤館)에서 3단을 받아서 귀국했다는 사실이 그가 게재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두 번째 주제인‘오대관의 형성 시기’는 각 관이 개설(창립)된 날짜를 일컫는 데, 이에 대해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대관의 선두는 1946년 1월 15일 서울 견지동 시천교(侍天敎) 예배당에서 개관된 청도관이었다. 이어 2달도 못되어 조선연무관 권법부(당수부)가 서울 소공동에 있었던 조선연무관 유도장 내에서 1946년 3월 2일에 시작되었다. 이듬 해 1947년 초 당수도(唐手道) 무덕관이 서울 용산에 소재한 철도청 내 건물에서 출범했다. 같은 해인 1947년 9월 1일 YMCA 권법부가 서울 종로에 위치한 YMCA 체육관에서 공식 개설되었다. 개성(開城)에 소재한 송무관은 동흥동 남부유도관 수련장을 빌려 1947년 9월 20일 개관되었고 11월 초(初)에 송도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오대관의 개설 또는 창립일에 관한 이 같은 결론은 국기원 지도자 연수교재와 홍보용 사이트를 비롯한 기존의 태권도사 자료에 기록된 날짜가 모두 수정되고 변경되어야 하는 학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세 번째 주제인‘오대관의 발달 과정’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청도관은 매일 오후 4시부터 일상 수련이 시작되었고 6개월마다 열리는 정기심사 9회와 특별심사 1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3회 정기 연무시범과 4회의 특별 연무시범 등 총 7회의 시범 행사가 거행되었다. 조선연무관 권법부(당수부)는 저녁 6시 반부터 일상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총 8회의 모서(冒暑) 및 모한(冒寒) 수련이 거행되었다. 승단급 심사는 총 9회가 열렸다. 한편 무덕관의 일상 수련은 주로 점심시간에 이루어졌다. 무덕관의 첫 심사는 청도관의 3회 심사와 합동으로 시행되었고 7회 심사까지 이어졌다. 무덕관은 초기 사용했던 무예명이었던‘당수도(唐手道)’를 1949년에 이르러‘화수도(花手道)’로 개칭하고 국내 최초로 현대식 교본도 발간했다. 이어 1949년 7월 철도청 내의 교통학교 강당에서 대대적인 연무시범을 개최했다. YMCA 권법부는 매일 오후 5시 반부터 7시까지 일상 수련을 했다. 1949년 난지도 여름수련회 등 모서와 모한 수련회도 열렸다. 관원들의 승단급을 위한 6회의 정기 심사와 1회의 중간 심사가 열렸다. YMCA 권법부의 첫 시범은 체신부를 포함한 4개 권법부가 참가하여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후 2회를 거쳐 3회 연무시범이 한국전쟁 하루 전날에 열리기도 했다. 송무관은 1947년 9월 개성시 동흥동 남부유도관에서 개설된 이래 그 해 11월에는 송무관 창립 기념 연무대회와 이듬 해 11월에 창립 1주년 연무대회가 열렸다. 송무관은 한국전쟁 전까지 총 6회의 심사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네 번째 주제인‘오대관의 사적(史的) 의의’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발달된 외래 무예의 주체적 도입(導入)이었다. 권법과 당수로 불리었던 오대관의 무예들은 광복이 되면서 성립한 외래 무예였다. 각 관의 창설자들은 젊은 시절 만주와 일본에서 그것을 배우고 귀국함으로써 한국에‘도입(導入, introduction)’되었다. 둘째, 오대관의 주된 무예 명칭으로 사용되었던‘당수도’에 대한 역사적, 근원적 인식도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이에 따라 이원국과 황기 등 오대관 창설자들은 당수도가 인도인 달마대사에 의해 중국, 오키나와, 일본으로 전래된 무예이었으므로 일본색이 강한 공수도보다 원래 이름인 당수(토오디이) 또는 당수도란 명칭을 채용했다. 셋째, 오대관 무예가 발달함에 따라 한국적 변용(變容)이 시작되었다. 오대관이 형성된 후 승단급 심사에서 자유 겨루기와 연무대회에서 발차기를 활용한 기술들이 적극 개발되고 활용되면서 택견의 차기와 결부된 한국적 특색을 띤 무예로 변천하는 시초가 되었다. 넷째, 상호 교류와 경쟁을 통한 발전이 촉진되었던 점이다. 특히 오대관 끼리 관세(館勢)와 실력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상호 발전을 촉진하는 원동력도 될 수 있었다. 다섯째, 통합된 단체 구성을 위한 노력에서도 그 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오대관 창립자들이 동참한 협회 구성이 여러 번 시도되었다가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관 통합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태권도 사적(史的) 의의를 갖는다. 비록 통합이 성사되지 못했지만 오대관 창설자들이 공동 단체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같은 노력은 추후 1961년 명실상부한 협회 창립에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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