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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정찬대 (성공회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지도교수
김동춘
발행연도
2019
저작권
성공회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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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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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은 세기의 비극이다. 세계는 냉전 체제로 급속히 양분됐고, 남북(南-北)은 각 체제 안에서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체제 이념은 이후 한반도의 정치 질서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해방 이전부터 내재돼 온 계급갈등과 동서(東-西) 간 냉전은 이데올로기 갈등 측면에서 한국전쟁을 웅변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때 ‘적’으로 분류됐던 이들이 사상적 전환을 통해 공존하고 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포로를 배태시킨다. 그들에 대한 처우는 승전국의 지위에서 패전국 국민을 다루듯 가혹하며, 이 과정에서 개인의 신념은 무너진다. 포로들은 남한사회 국민으로 재사회화되거나 이를 거부할 시 철저히 격리된다. 분류하고, 낙인찍고, 가두는 것. 이것이 포로들이 겪는 일련의 과정이다.
한국전쟁기 포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6·25 전쟁 기간 유엔군 관할에만 17만 명 이상에 달하는 전쟁포로들이 있었다. 이는 북한 정규군(인민군)과 중국군(중공군), 민간인 억류자(빨치산 포로 포함) 등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전쟁포로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처리하도록 돼 있으나 정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유엔군은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포로 본인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주장했다. 북한 측은 그러나 이것이 제네바협정에 위배된다며 포로 전원에 대한 즉시 송환을 요구했다. 결국 포로 송환 문제는 휴전협정 의제 가운데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됐다.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이태 뒤인 1953년 7월에 타결된 것도 이러한 상황을 방증한다. 결국 최대 암초를 풀기 위한 한 방법으로 ‘중립국 선택’이 주어졌다.
포로들은 범주에 따라 달리 처리됐다. 먼저 정규군 출신 포로들은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에 따라 처리됐고, 북한 측과 유엔군의 정전협상에 따라 그 절차가 이뤄졌다. 전향 후 남한에 정착하거나 친공(親共) 포로가 되어 북송이 가능했으며, ‘중립국’인 제3국으로의 선택 또한 가능했다.
문제는 토벌 작전 중 생포된 비정규군 즉, 빨치산 포로들이다.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이들은 전쟁포로임에도 포로의 신분이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국제 협약에 따른 보호 조치 없이 국내법에 의해 처리됐다. 물론 이는 정전협상 과정에서 논의될 포로 송환 문제를 염두에 둔 사전 조치에 따른 결과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북한 정규군 출신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낙동강 전투에서 패퇴한 뒤 월북 중 입산한 이들이다. 전쟁포로에 이들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제네바협정과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 처리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빨치산 포로들은 어떤 이유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것일까. 본 논문은 여러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그 배경을 추적했다. 그 결과 일대일 송환 원칙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는 시점에 이들이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빨치산 연구뿐만 아니라 이후 전쟁포로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논쟁점이 될 것이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기 포로의 분류 및 처리, 수용 체계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빨치산 포로들의 집결 수용소인 광주중앙포로수용소를 면밀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이들의 처우, 실태, 현황은 물론 여러 면담자의 구술을 통해 광주중앙포로수용소의 수용시설도를 복원했다. 아울러 빨치산 포로들이 어떤 신문 과정을 거쳐 형이 집행됐는지에 대해서도 추적했다.
본 논문에서는 광주지역 또 다른 수용시설인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도 함께 논의가 이뤄졌다.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는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분류돼 이송된 전향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됐다. 때문에 반공포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도 유용하다. 더욱이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는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이승만은 이날 ‘0시’를 기해 전국 7개 반공포로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석방시켰다. 그런데 탈출 포로 가운데 38%에 달하는 이들이 이곳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에서 탈주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정부의 포로석방 사건을 분석하는데도 적잖은 가치를 지닌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총칼을 들이댄 사람들, 하나의 체제 안에 이제는 공존하는 사람들, 애초 누군가의 이웃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을 이들을 ‘적’으로 간주했던 인간성 말살의 현장을 들여다봄으로써 전쟁과 포로가 갖는 의미를 되짚고자 함이 본 논문의 가장 큰 목적이 될 것이다. 전쟁포로에 대한 연구의 지평이 좀 더 진일보할 수 있길 바란다.

목차

Ⅰ. 서 론 1
1. 연구 목적과 필요성 1
2. 연구 설계 5
3. 논문의 구성 8
Ⅱ. 전쟁포로와 국민 : 이론틀 13
1. 국민국가 형성과 ‘반공 국민’ 13
2. 기존 연구 검토 18
Ⅲ. 한국전쟁과 포로 22
1. 포로의 성격과 구성 22
2. 전국 수용소 현황 및 분포 27
3. 빨치산 포로의 ‘민간인 억류자’ 분류 40
Ⅳ. 후방 토벌작전과 빨치산 포로 51
1. 국군 제11사단 ‘견벽청야’ 작전 51
2. 백(白)야전전투사령부 ‘지리산대토벌’ 작전 59
Ⅴ. 광주중앙포로수용소 : ‘빨치산수용소’ 사례 연구 67
1. 수용소 현황 67
2. 생활 양태 및 환경 72
3. 포로 신문과 취조 81
Ⅵ. 광주상무대포로수용소 : ‘반공포로수용소’ 사례 연구 92
1. 수용소 현황 및 생활 양태 92
2. 반공포로 석방 사건 99
3. 이승만과 미국의 이해관계 105
Ⅶ. 결론 109
1. 절멸의 대상, 강요받는 국민 109
2. 규정된 적, 그리고 다시 공존 112
참고문헌 115
ABSTRACT 124
부 록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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