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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리우식 (명지대학교, 명지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이태호
발행연도
2020
저작권
명지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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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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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박성환의 삶과 예술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미술사적 의의를 검토하고자 한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박성환은 지주 집안 출신으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고향 해주는 이북 지방의 대표적인 대 도회지로서 여러 신식 근대 문물의 수용에 개방적이었다. 박성환은 해주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동경미술학교 출신 선우담의 지도하에 정식 서양화 교육을 받았다. 선우담의 지도 아래 해주고보 교우회 미술부는 전국적인 미술 명문으로 이름 높았다. 이 시기 박성환은 계절감을 잘 살린 외광 풍경화 기량을 익혀나갔으며,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박성환은 193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본격적인 서양화 교육을 받게 된다. 그는 동경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1940년 동경의 문화학원에 진학하였다. 문화학원은 유영국, 김병기, 문학수, 이중섭 등 걸출한 한국근현대화가들이 거쳐 간 곳이지만 박성환이 입학한 1940년에는 다수가 졸업한 상태였으며 이중섭만이 1941년 문화학원 연구과에 진학하여 박성환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박성환은 당시 문화학원의 자유주의 교육에는 만족하였으나 학생들의 실력에는 크게 실망하고 본인 개인 화실을 차려 독학으로 서양화 연구를 진행하였다.
독학하다시피 그림에 몰두한 박성환은 1941년 당시 일본 서양화 화단을 주도하던 미술전람회 이과전에 <절 입구>로 입선하고 다음해인 1942년에는 <겨울 장수산>으로 입선, 1943년에는 <수향황혼>으로 입선하여 1944년에는 이과회 무감사 초대작가가 된다. 이들 작품은 외광파 인상주의 풍경화였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겨울 장수산>의 경우 한겨울의 추위 탓에 물감을 나이프로 밀어붙이면서 제작하여 화면에 특유의 거친 마티에르가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경 유학시절 박성환은 인상주의 이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루오를 비롯한 서양 전위 미술을 접하고 있었다. 또한 소를 비롯한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소재를 탐구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박성환은 고향 해주에 설립된 해주예술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학교는 이북지역 최초의 예술학교에 해당하나, 이후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교사진과 학제가 지속적으로 바뀌는 혼돈을 겪었다. 박성환은 공산당과 예술적 이념 및 표현 방식에서 불화를 일으켜 신변의 위협을 받아 월남한다. 이어진 6·25 전쟁 시기 박성환은 종군화가단의 일원으로 정훈 포스터 제작과 군인 초상 제작 등 전쟁 미술에 종사한다. 그의 전쟁화 <6월 27일 미아리 방호전>은 1954년 6·25 4주년 기념 전람회에서 국방부장관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전후 박성환은 미술 교사와 서라벌예술대학 창설 취임 교수로 잠시 교직 생활을 하나, 1963년 이래 완전한 전업 작가로서 회화 창작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출품을 시작으로, 1959년 제8회 국전 이래 추천작가로서 국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초기 국전 작품은 이과회 출품작을 잇는 설경 산수화가 주를 이루며 서울 외곽의 도시 풍경도 다수 출품하였다. 당시 국전 서양화단의 조류에 발맞추어 앵포르멜, 기하학적 추상, 단색추상 등 다양한 비구상·반구상 회화를 연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목우회 참여와 구상전 창설 주도 등의 경력에서 보듯 극단적인 추상으로의 치우침이나 혹은 구태의연한 구상화 모두를 거부하고, 그 양자 사이에서 풍성한 조형언어를 실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박성환은 내적으로 몰입하는 예술가로서 미술계의 유행이나 파벌주의에 동요함이 없이 오로지 작업에만 열중해 나갔다. 그의 회화적 제재는 향토적이고 목가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은 계절적으로는 가을, 하루 중에는 석양이 지는 시점에 집중하였다. 수확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인물들이 소나 말이 노니는 마을에서 무리지어 춤을 추거나 귀가하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이들 향토색 짙은 회화들은 은은한 파스텔 톤의 색조 혹은 짙은 담갈색의 황토빛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표면의 거친 외관은 루오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 이후 박성환은 그의 향토적 회화에 리드미컬한 율동과 강렬한 색채감을 더하기 위해 농무 주제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집중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현존하는 그의 농무 작품은 200여 점 이상을 헤아릴 정도로, 이 시기 박성환은 농무의 조형적 가능성을 극대화해나갔다. 박성환은 그의 농무 연작에 테마와 색을 넘어서는 보다 더 한국적인 요소를 추가하고자 동양미술의 조형적 특징을 집중적으로 응용하였다. 그는 다양한 전통 수묵 담채의 기법을 응용한 수채 연작을 통해 여백의 미와 모필의 운용, 강렬한 묵선을 탐구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박성환은 병풍·선면화·도화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농무 연작을 진행하였다. 박성환은 농무 뿐 아니라 불교 미술, 고대 신라 예술을 비롯한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작업결과를 남기기도 하였다.
박성환의 회화 세계는 보다 한국적인 회화를 완성하기 위한 긴 여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회화는 한국의 산천과 도시의 실경을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려내는 데에서 시작하였지만, 앵포르멜 등의 추상 미술까지도 시도하는 등 다양한 조형적 실험 가능성을 마다하지 않았다. 목우회 참여와 구상전 창설 등의 미술 단체 활동에서 드러나듯 박성환은 시각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성을 보존하면서 형태의 다양한 변화와 해체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의 농무 연작에서 확인되는 과감한 생략과 변형, 동양화적 요소의 도입은 한국적 춤이 주는 율동적 에너지를 시각화하는데 적극 활용되었다. 박성환은 색채를 통해 한국성을 표현하는 방식도 깊이 있게 탐구하였다. 그의 초기 향토적 작품은 담갈색의 황토색을 주조 색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색상 톤이 설채되었다. 이후 진행된 농무 연작에서는 강렬한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농무의 연희적 활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시도로 이루어진 박성환의 예술적 탐구와 성과가, 한국적 회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한국근현대미술계의 오랜 질문에 대한 조형적 응대로 기억되길 바란다.

목차

그림목차 ⅲ
표목차 xv
국문초록 xvi
제1장 서론 1
제2장 수업 및 일본 유학(1919∼1944) 4
제1절 성장 배경 4
제2절 미술해주고보: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2
제3절 가와바타 미술학교 진학 39
제4절 문화학원 진학 44
제3장 미술계 활동(1945∼1970) 89
제1절 해방 후 북한 미술계: 해주미술학교의 설립과 운영 89
제2절 종군 미술 활동 102
제3절 전후 정착: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참여 122
제4절 단체 활동 146
제4장 회화세계 완성(1971∼2001) 150
제1절 향토색의 탐구: 소재주의적 접근을 중심으로 150
제2절 농무의 발견과 발전 161
제3절 농무 연작의 성숙과 확장 172
제4절 향토적 서정으로의 회기 183
제5장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박성환의 위상 197
제1절 목우회·구상전 참여의 의미 197
제2절 박성환의 미술사적 위상 211
제6장 결론 223
참고문헌 227
부록 262
Abstract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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