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세기 관료 문인이었던 經山 鄭元容(1783-1873)의 저술과 시, 산문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정원용 문학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장에서는 먼저 예비적 고찰로 鄭元容의 交遊關係와 政治活動을 살펴보았다. 정원용은 출사 전에는 주로 집안사람과 교유하였다. 이 시기 교유 인물 가운데 李相璜이 주목되는데 그는 정조대의 초계문신으로 李晩秀?金祖淳 등과 교유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정원용이 출사 후에 김조순 주변 인물과 교유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는 『弘齋全書』의 교정 참여를 통해 김조순을 비롯하여 그의 주변 인물인 南公轍?沈象奎 등에게 문재를 인정받으며 교유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정원용을 후학으로서 깊이 인정하고 아꼈다. 헌종대에는 정치적 협력 관계로서 趙萬永?趙寅永 형제를 비롯하여 그 주변 인물들과의 교류가 증가하였고, 이들의 교유는 철종 대까지 이어졌다. 철종 대에는 여러 모임을 통해 이들과의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여기에 金左根과 趙斗淳도 참여하였다. 철종 후반기로 가며 김좌근?조두순과의 교유가 증가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친밀감을 나누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도 띄고 있었다. 이외에 풍산 홍씨 가문과 이유원의 교유를 살펴보았다. 정원용은 풍산 홍씨 가문 가운데 洪錫謨?洪敬謨와 여러 혼맥으로 이어져 깊이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유원은 정원용의 질서로 그를 스승으로 따랐으며 학문 태도와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정원용은 이유원의 문학적 능력을 인정하였으며, 그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그를 인정하였다. 이유원은 정원용의 자식과도 교유 관계를 형성하여 대대로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원용의 정치 활동은 특히 그가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철종 시기와 고종 즉위 초를 중심으로 구명하였다. 정원용은 철종 시기 4차례 영의정을 지내며 철종을 보좌하고 국정을 이끌었다. 정원용은 철종의 즉위 초, 정순왕후의 승하 후, 壬戌民亂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웠을 때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정원용은 철종 초기에는 왕의 자질을 키워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 수 있게 학문을 독려하였으며, 정순왕후가 승하하고 영의정이 되었을 때 초계문신을 다시 건의하여 철종의 정사에 힘을 실어 주려 하였다. 壬戌民亂으로 국정이 어지러웠을 때는 영의정으로서 혼란을 수습하고 환곡을 재정비하여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려 하였다. 이처럼 철종은 중요한 시기마다 정원용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했고 정원용도 그에 부응하여 철종을 보좌하였다. 철종의 승하 후 정원용은 院相에 임명되어 고종이 무사히 즉위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고종 즉위 초기 대원군이 권력을 잡는 데 협력하였다. 3장에서는 鄭元容의 著述을 고찰하였다. 정원용의 저술은 총 21종으로 먼저 시기에 따라 저술의 목록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정원용의 저술을 개괄하였다. 그 중 『經山日錄』은 그의 기록정신을 잘 보여주는 저술로 다른 일기 저술인 『?史東征日記』와 연행록인 『燕?錄』, 여타 다른 저술에서 초록하기도 하여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일기가 되었다. 이처럼 정원용이 다른 저술에 있는 내용을 다시 초록한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완전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해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일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용은 실제로 자신의 일기를 사료로 삼아 다른 저술에 초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원용의 저술들은 각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文獻撮錄』과 『袖香編』은 정원용의 만년에 이루어진 차기체 저술로, 관료 생활을 하며 참고할 만한 조목들을 여러 책에서 뽑아 다방면에 걸쳐 기록하였다. 정원용은 차기를 통해 지식을 모은 뒤 편찬 목적에 맞게 선별하여 저술에 수록하였다. 분류나 첨예한 변증을 가하지 않아 학계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나, 당시 관료 문인의 학문 태도와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어 앞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저술이다. 4장에서는 정원용의 시를 살펴보았다. 먼저 그가 중앙의 관료로 벼슬할 때의 시를 살펴 그 안에 드러나는 자부심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시를 통해 관료 문인으로서의 정원용의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정원용은 시에서 진솔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정원용이 말한 情은 사람이 겪는 여러 일로 말미암아 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그는 특히 가족들에게 보내는 시에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또한, 가족에게 보내는 시에는 특히 장편의 古詩가 많은데 이는 형식이나 詩句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정감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편 고시의 특징을 활용한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남김없이 드러내기 위해 정원용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원용은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회령 부사로 부임하였을 때 특별히 이 지역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관심이 시에 자연스레 표출되었다. 정원용은 관료로서 북방의 제반 사실을 꼼꼼히 기록하였고 이는 시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북방의 風情을 시 속에 기록하였고, 이 지역의 영토에 관한 관심을 시에 드러내었다. 이를 통해 정원용의 시에 드러난 영토 인식은 그 시기 사대부 문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행을 다녀와서 지은 『燕?錄』을 중심으로 大淸 인식을 살펴보고, 여기에 실린 淸 文人과의 酬唱詩를 중심으로 청나라 문인과의 교유를 고찰하였다. 정원용은 청나라의 번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풍속이나 제도 부분에서는 여전히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는 이 시기 관료 문인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원용은 뛰어난 시문 능력으로 청나라의 여러 명사와 교유할 수 있었다. 특히 탁병념과 자주 왕래하며 교유하였는데, 그는 정원용의 시문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친구는 물론 동생과 아들까지 정원용에게 소개하였다. 정원용이 연경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명성을 듣고 먼저 찾아와 시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정원용의 시문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5장에서는 정원용의 산문을 살펴보았다. 정원용은 아내, 딸, 며느리, 여동생, 어머니 등 가문의 여성을 대상으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아내의 수서에서 자신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던 아내의 모습을 나타내었고, 제문에서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50여년 간 화락하게 지냈던 부부의 모습을 부각하였다. 여동생의 제문에서는 자신과 일상을 함께 했던 여동생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어머니의 가장을 작성하며 어머니의 모습을 孝?勤?儉?仁?慈 다섯 가지의 항목으로 범주화하여 제시하면서 이에 해당하는 일화를 통해 어머니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자식을 위해 그 무엇도 불사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정원용은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기에 여기서도 정에서 촉발되어 나온 감정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원용의 비지류 산문을 살펴보았다. 정원용의 비지류 산문은 다른 문헌을 인용하거나 핵심만을 제시하는 등의 서술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고, 抑揚의 방법이나 대화와 傳言을 통한 재연의 修辭法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묘주를 좀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일률적인 묘지문과는 다른 묘미를 획득할 수 있었고, 엄정한 형식 내에서도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으로 인해 그의 비지류 산문이 당대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17세기 이후 비지문에서 엄정한 형식 안에서도 다양한 구성과 서술 방식을 통해 문학성을 높이고자 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이후로도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원의 비지문을 통해 이러한 경향이 19세기까지도 이어져 계속해서 유효했음을 알 수 있다. 정원용은 지방관을 두루 경험하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가 왕에게 아뢴 啓辭를 통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정원용은 言路의 開放, ‘惟輕’과 ‘不留滯’를 중심에 둔 형옥의 처리, 지방관의 신중한 선택을 국정 운영의 중요한 바탕으로 삼았으며 이를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정원용은 재상으로서 개혁을 통해 명예를 구하는 것 보다 옛 법도를 지키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정원용의 경세 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를 통해서도 이러한 성향을 알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세 가지는 앞선 시기부터 꾸준히 강조되던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논의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정원용의 이러한 논의는 그가 지방관과 여러 관직을 거치며 쌓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의례적으로 하는 공허한 말에 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재상으로서 큰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적절히 일을 처리하였기에 헌종?철종?고종 조까지 재상으로서 중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