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송인주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 일반대학원)

지도교수
전인갑
발행연도
2023
저작권
서강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5

표지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논문은 청말(1860~1911) 동북 변경 지역(만주)의 광무(鑛務: 광산 개발 정책)을 통해 청조가 동북 변경의 지배체제를 어떻게 재구축하고자 했는지 규명하고자 하는 글이다. 1860년대 이후 러시아와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이 동삼성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청조는 이에 대응하고자 동북 변경 지역의 지배체제를 재편하여 제국으로부터 이탈을 막고자 하였다. 청말 동북 변경에서 추진된 광무는 청조의 동북 변경 지배체제의 재편 과정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우선 청말 동북 국경 확정의 과정에서 동북 광무는 국경 지대 지배를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880년대 이후 러시아, 한국, 일본 등 주변 국가로부터 국경 지대의 안보가 위협받자, 청조는 흑룡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동북 국경 지역에서 병력과 초소를 재배치하고, 국경 지역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국경의 방비를 충실히 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청말 동북 국경 확정 과정에서 흑룡강과 두만강 지역의 광산 자원들이 러시아와 일본의 이권 개입의 수단이 되었고, 국경 분쟁의 중요 요인이 되었다. 청조는 흑룡강과 두만강 국경의 광산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지역들에 병력과 초소를 배치하는 한편, 광산 개발을 통해 국경의 광산 지역으로 인구 유입과 도시화를 추진하고, 국경 광산 지역들에 새로운 행정 기구를 설치하여 국가 행정력을 강화하였다.
청말 동북 행정 체제 재편에서도 동북 광무는 국가의 행정력을 침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870년대부터 청조는 팔기주방체제(八旗駐防體制)였던 동북 변경 지배체제를 중국 지역과 같은 주현체제(州縣體制)로 전환하였고, 동삼성 지역에는 많은 주(州)와 현(縣)이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조는 봉천 본계호(本溪湖) 일대의 탄광을 개발하고 이 지역에 본계현(本溪縣)을 설치하여, 일본의 이권 개입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길림의 협피구 일대 금광 지역에는 한변외(韓邊外)라는 금비(金匪) 집단이 청조의 지역 통치를 방해하고 있었는데, 청조는 이들을 회유하여 국가의 통치체제로 끌어들이고 한변외가 웅거한 협피구 지역에 화전현(樺甸縣)을 설치하였다. 흑룡강 하류 유역의 삼성(三姓)은 원래 청조와 흑룡강 하류의 변민(邊民) 사이에서 담비 가죽 교역이 이루어졌지만, 1860년대 러시아가 흑룡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면서 청과 변민 사이의 담비 가죽 교역이 중단되었다. 이에 청조는 삼성 지역의 금광을 새롭게 개발하여 이 지역의 인구 유입과 도시화를 추진하였고, 이 지역에 의란청(依蘭廳)을 설치하여 행정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청은 동북 변경의 여러 광산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면서 그 일대의 행정 체제를 재편하였다.
청말 동북 광무는 청조의 동삼성 지역 자원 관리 체제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청조는 19세기까지 이 지역에 봉금(封禁)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 한인(漢人)들의 유입을 막고, 청 황실과 만주인들의 경제 독점 지역으로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의 진출과 한인의 이주로 인해, 봉금 정책의 효과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 지역의 자원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0년대에 들어서 동삼성 지역의 광물 자원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동삼성에 광정조사국(礦政調査局)과 권업도(勸業道) 등의 광정 전문 기구를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러시아, 일본 등의 광산 이권 개입으로부터, 동삼성 지역의 자원 주권을 보호하고 적극적으로 광산 자원을 개발하였다.
마지막으로 청말 동북 광무는 동북 변경 지역의 재정 개혁에도 영향을 주었다. 청말 동삼성 지역은 1880년대부터 변경 지배체제 재편 작업과 외채 등으로 재정 위기를 겪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청조 당국은 광세(礦稅)를 새로운 재원으로 주목하였다. 더군다나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북 변경 진출이 이루어지자, 동북 변경 지역에서의 청조의 국가 주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광세 징수’가 주목되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청조의 동북 광무는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동삼성 지역의 광세는 동삼성 지역의 변방(邊防) 강화 비용과 국가세(國家稅)로 충당되었다.
청말 동북 광무는 청 제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에 대응하여, 동북 변경 지역에 국민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경 확정, 행정 구조 재편, 자원 관리 체제 수립, 재정 개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물론 청말 동삼성 광무는 기술의 미비, 자본의 부족, 경영의 미숙 등으로 경제적으로 한계를 드러냈지만, 청조가 동삼성 지역 지배 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중요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청조는 동삼성 광무를 통해서 19세기까지 ‘발상지(發祥地)’, ‘용흥지지(龍興之地)’로 불리며 청 황실과 만주인들만의 특수 지역으로 대우받던 동삼성을 국민국가로서의 청 제국의 동북 변경으로 재편하고자 하였고, 청조의 이러한 작업은 이후 동삼성 지역이 중국 근현대 국민국가의 ‘동북 삼성(東北三省)’으로 자리 잡는 주춧돌이 되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