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5년 동안 우리는 범세계적으로 기억이 도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나라, 모든 사회ㆍ인종ㆍ가족 집단들은 그 동안 과거와 맺어온 전통적인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관제 역사의 비판과 은폐된 과거의 되찾기에서 가계도 연구의 발전 및 기념제 열기의 증대를 거쳐 박물관 증축과 기록물 보존과 개방에 대한 관심 확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열정과 갈등 그리고 강박관념마저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기억의 시대에 처음 들어선 것은 아마도 프랑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비에트가 몰락한 이후의 동구권 국가들, 독재자들이 몰락한 라틴 아메리카, 아파르트헤이드가 종식된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알 수 있듯이 범세계적 규모로 기억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1970년대에 프랑스에서 기억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와 관련이 있다. 첫째는 경제위기 시대의 도래이다. 1974년에 ‘오일 쇼크’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세계의 모든 선진 산업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지만, 프랑스의 경우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전통과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소위 ‘영광의 30년’이 이로 인해 막을 내렸다는 점에서 더욱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성장의 뒤안길에서 이제 프랑스는 번영의 대가뿐만 아니라 사라져 가는 것, 특히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프랑스의 영원한 토대를 이루었던 그 농촌적 기반에 대해 눈을 돌려야 했다. 1975년에 들어 농민층이 인구의 10% 이하로 떨어지고 교회의 라틴어 미사가 공식적으로 마감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프랑스가 가톨릭 농민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공동체-기억’의 종언은 시대가 바뀌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단절로 다가왔다. 농촌 세계의 상실, 이것은 진정으로 역사가 자크 르 고프가 ‘긴 중세(long Moyen Age)’라고 불렀던 것과 프랑스 사이를 잇고 있던 탯줄을 잘라낸 셈이었다.
둘째는 ‘드골 이후’ 시대의 개막이다. 1970년 드골이 사망함으로써 드골주의의 전통이 막을 내렸다. ‘조국의 해방자’ 드골의 사망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소위 “레지스탕스적” 시각 즉 한줌의 배반자와 매국노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인 모두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는 식의 일률적인 사고방식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포스트-드골 시대는 드골이 만들어 놓은 제5공화정의 제도들을 이어받음으로써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공화 전통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왕조 전통의 프랑스)도 역시 프랑스인의 정체성 속에 온전히 제 몫을 얻은 시대였다. 프랑수아 퓌레가《프랑스대혁명을 생각한다》(1978)에서 내놓은 유명한 구절, 즉 “프랑스대혁명은 끝났다”라는 표현은 혁명 이전의 프랑스가 마침내 복권되었음을 의미한다. 왕조적 전통에 대한 긍정적 수용 작업은 1987의 카페 왕조 1,000주년 기념식이나 1996년의 클로비스의 개종 1,500주년 기념식이 상당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셋째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프랑스 공산당의 몰락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기는 혁명의 종주국으로 여겨져 온 프랑스에서도 혁명 이념에 대한 신뢰 상실을 가져왔다. 혁명 이념에 충실한 역사적 전망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만 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단절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혁명 이념의 퇴조와 더불어 단절로서의 역사관이 설득력을 잃고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및 전통이 강조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내가 “기념제의 시대(ere de la commemoration)”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던 이 기억의 운동은 아주 전면적이고 막강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 연원에 대해 탐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기억의 도래는 두 가지 굵직한 역사적 현상― 하나는 시간적 현상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현상이다―의 교차로에서 발생한다.
첫 번째는 “역사의 가속(加速)”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다니엘 알레비가 처음 만들어낸 이 표현은 가장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현상은 이제 지속과 항구가 아니라 변화 그 자체라는 것을 뜻한다. 날로 빨라지는 변화, 재빨리 멀어져가는 과거 속에 있는 모든 것의 급격한 동요, 이러한 반전(反轉)은 현재와 미래를 과거에 연결시켜 주던 역사적 시간의 통일성을, 그 멋지고 단순한 단선적 모형을 깨뜨렸다.
미래를 준비하려면 과거에서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현재에 그 의미를 부여해 준 것은 바로 사회든 국민이든 가족이든 한 집단은 자신의 미래에 비추어 스스로를 만든다는 관념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미래를 과거의 복원으로서, 진보의 형태로서, 아니면 혁명의 형태로서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역사”를 구성하는 이 세 가지 형식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해 조금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바로 이 불확실성이 무언가 기억해야 할 의무를 현재에 부여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지금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증명해줄 수 있는 모든 흔적과 표시들을 긁어모을 의무를 안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널리 이야기하는 소위 ‘기억의 의무’라는 정언명제를 현재에 부여한 것은 바로 목적론적 역사관의 종언이다.
‘역사의 가속’은 두 가지 기억의 효과를 낳는다. 첫째는 ‘상실’ 감정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누적’ 효과로, 이는 기억의 기능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박물관, 기록보존소, 도서관, 자료집, 연대기 등 기억의 기구와 제도들을 양산한다. 둘째는 불투명한 미래와 희미해진 과거 사이에서 현재가 자의식을 지닌 실체로 자율성을 얻게 되는 효과이다. 과거가 더 이상 미래의 보증인이 되지 못하자 기억이 역사의 계속성을 보장하는 활동적 주체로 나타난 것이다. 옛날에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유대가 맺어졌고 현재는 단지 연결고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현재와 기억 사이에 유대가 맺어진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의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것은 현대 세계를 일구는 데 한몫을 담당하고 있는 인민, 종족, 집단 또는 개인의 강렬한 해방 운동으로, 달리 말하자면 과거를 복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소수자들의 온갖 기억들이 신속하게 출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소수자 기억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탈식민화(decolonisation)로 나타난다. 식민 압제의 종족적 휴면 상태에 놓여 있던 사회들이 역사의식과 기억의 복원을 추구하는 ‘세계적’ 탈식민화, 서구 사회에서 성적, 사회적, 종교적, 지역적 소수자들이 그동안 자신들을 거부해온 전체 공동체 속에서 차이를 인정받고 사라져 가는 정체성을 복원하려 하는 ‘내부적’ 탈식민화,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20세기 전체주의 독재 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해방된 인민들이 그동안 억제된 자신들의 옛 기억을 되살리려는 ‘이데올로기적’탈식민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소수자 기억들이 폭발함으로써 역사와 기억 사이의 상호 관계가 근본적으로 뒤바뀌었으며 지금껏 거의 사용되지 않던 “집단기억(memoire collective)”이라는 개념이 널리 부각되었다.
권력자 또는 학문적, 직업적 권위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역사와는 달리, 기억은 민중적 항의의 외침이라는 새로운 위엄과 특전을 발휘한다. 기억은 억눌린 자, 핍박당한 자의 복수로, 지금껏 역사에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자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과학적 기반을 자부해온 역사학은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지지만 사실상 기억에 ‘맞서서’ 만들어져 왔는데, 이는 기억이 개인적이고 심리적이며 일회적이고 증거의 영역에 속할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집단의 영역이었으나 기억은 개인의 영역이었으며, 역사는 단수였으나 기억은 정의상 복수였다. 개인이 기억을 가졌다면, 공동체는 역사를 가졌다. 따라서 해방과 신성의 요구를 지닌 집단기억이라는 관념은 문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 공동체가 기억을 갖는다는 관념은 사회에서의 개인의 위상과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정체성(identite)이라는 개념이 최근에 신비롭게 대두하게 된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기억이라는 개념만큼 유사한 의미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개념에서 집단적인 개념으로, 주관적인 개념에서 객관적인 개념으로 변한 것이다. 정체성은 ‘외부로부터’ 정의되는 집단 범주가 되었으며, 지금의 나 자신으로 즉 유대인, 노동자, 흑인, 알제리인 등으로 되고자 한다는 ‘당위’의 형식이 되었다. 이러한 당위성에 의해 기억과 사회적 정체성 사이의 유대가 맺어지는 것이다.
프랑스는 ‘역사’의식이 ‘사회’의식의 틀을 지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특히 제3공화정(1871-1945)에서는 역사가 사회적ㆍ정치적 유대의 중추 구실을 했다. 학교에서《아동용 라비스》와 같은 교과서들이나《두 아이의 프랑스 일주》와 같은 아동용 도서들이 국민 공동체의 위대한 서사를 전달했다. 베르생제토릭스에서 십자군 전쟁을 거쳐 대혁명에 이르는 위대한 국민적 서사시, 잔다르크에서 나폴레옹으로 이어지는 위인들의 연대기, 영광과 시련의 순간들을 노래하는 위대한 국민의 역사를 노래했다. 그것은 종교적 교리문답에 가까운 성인전이었으며 조국애를 기리고 국민적 단합을 꾀하는 신성화된 역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 정체성과 귀속감을 일구는 기억들, 즉 노동자의 기억, 유대인의 기억, 왕당파의 기억, 브르타뉴인의 기억과 같은 소수자의 기억들이 있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체성이 형성되고 강화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두 기억 사이의 분리 위에서였다. 그러나 돌연 이 틀이 깨졌는데, 이는 한편으로 국민적 일체성이라는 신화가 안으로부터 마모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소수자들이 제 몫의 해방 요구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의 추세는 프랑스가 근본적 변화를 겪은 1970-80년대에 나란히 나타났다. “국민 기억(memoire nationale)”의 문제가 대두하게 된 내막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국민적 정체성의 자리에 사회적 정체성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의 영광과 사명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은 안으로부터 와해되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의 위세를 실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국민 정체성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내부적 탈식민화와 집단 정체성의 해방이라는 강한 흐름이 국민으로 동화되어 가던 모든 소수자들으로 하여금 자기만의 역사, 자신의 “기억”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 공동체의 인정을 촉구하도록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국민 기억’이라 부르는 것은 이와 같이 집단의 기억들의 대두와 침투에 의해 역사적 기억이 변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기억의 대두라는 이 물리칠 수 없는 추세는 곧장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는 정치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과거에 대한 활용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는 기념행사의 놀라운 증가로 나타난다. 대혁명 200주년 기념식과 새 천년 행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 클로비스 개종 1500주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 노예제 폐지 150주년 등 해마다 기념제가 열린다. 기념제가 증대한다는 것은 이제 과거는 더 이상 단일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과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것은 바로 현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는 역사가가 더 이상 역사의 해석과 재구성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나의 집단 역사와 여러 개의 개인 기억들이 병존하던 시대에 역사가는 과거에 대한 유일한 권위자였으며, 지난 한 세기 동안 소위 과학적 역사는 이러한 역사가의 특권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를 생산하는 데에 역사가만이 아니라 재판관, 증인, 미디어, 입법자 등도 한 몫을 한다.
오늘날 기억의 신성화가 가져오는 진정한 문제는 기억의 의무의 버팀목이었던 해방과 자유의 원리가 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순간에 폐쇄와 배제의 동기이자 전쟁의 무기로 변모되어 버리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기억의 요구는 원리상 ‘법정에의 호소’이지만 실제적으로 때로는 ‘위해에의 호소’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 세기 전에 니체가《반시대적 고찰》에서 역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것을 본받아 “역사”라는 단어를 “기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기억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때가 되었다: “불면증, 되새김질, 역사[‘기억’으로 이해하자] 감각에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를 넘어서면 개인이든 종족이든 문명이든 생명체는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