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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7호
발행연도
2007.9
수록면
139 - 172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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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누구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렸으나 사실은 무려 3년간이나 한국 교회사 속에 실재했던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60년대 초 고려파와 소위 “승동측”이라는 두 장로교단들이 합동했다가 재결별한 사실이다. 수 백개의 교단이 난립하여 무수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한국 장로교단들의 재결합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무려 반 세기 전에 있었던 장로교 연합을 위한 시도와 그 결과를 회고하는 것은 이 시대 한국 장로교회에 중요한 시사를 줄 것이다. 양 교단은 왜 연합했다가 불과 3년만에 헤어지고 말았는가? 장로교단들의 연합과 일치는 불가능한 일인가?
여러 정황과 진술들을 미루어 볼 때 1960년 당시 고신, 승동 양 교단의 합동은 같은 신앙과 신학을 가진 교회들 사이의 일치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순수한 연합이라는 성격보다 각 집단 지도자들의 개인적 형편과 파당적 이익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된 불순한 결합이었다는 성격이 짙다. 고려측은 당시 교단 지도부에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던 환경들, 즉 예배당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의 부당성에 대한 경기노회 주류의 반발과 이탈, 박윤선 교수의 고려신학교 이탈 등으로 인한 교단 내부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으로 합동을 추진했던 측면이 강하다. 한국 장로교 내의 소수파로서 홀로 서기가 한계에 도달한 가운데 다른 집단과의 연합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편, 승동측은 그들 나름대로 못지않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연동측과의 결별 과정에서 주한 외국 장로교 선교부 전부가 연동측의 정당성을 인정함으로 자파의 도덕적 명분의 약화, 국제적 고립, 국내외 교회들의 부정적 시각, 주요한 교회 기관들의 상실 등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집단이라는 당당한 전통과 강경 보수라는 신학적 입장을 가진 고려파와 합침으로 도덕적 명분을 강화하는 한편 장로교 분열이 연동측의 신학적 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연동측과의 분열을 신학적 정통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몰아가고자 했다.
합동을 통한 국면 타개에 급했던 고려파는 해방 후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해 오던 바, 신사참배 가담자들의 공적 참회고백, 자숙을 통한 정화 내지 권징 시행에 대한 일절의 언급 없이 승동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교회 일치를 이루었다. 동시에 한상동은 신학교의 단일화 내지 일원화라는 합동 원칙에도 동의함으로 자신이 설립하고 애지중지했던 고려신학교의 독자적 존속조차도 합동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막상 합동한 후 고려측 인사들은 총회, 노회, 신학교 이사회에서의 정치적 열세로 인한 교권적 소외감에 시달리면서 합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한상동 목사의 양자인 이근삼 박사의 총신 교수 채용이 박형룡 교장의 거부로 무산되자 그러한 고려측의 소외감은 극에 달했다. 한상동은 결국 돌발적이고 독단적으로 고려신학교 복구를 시도했고 불만에 가득하던 많은 구 고려측 인사들이 그것에 호응했다. 한상동의 고려신학교 복구 선언은 재분리, 혹은 소위 “환원”의 첫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합동된 부산노회의 여러 구 고려파 인사들이 구 고려파 교단 “환원”을 선도했다. 그러나 같은 부산노회 안에 있는 상당수 구 고려파 인사들은 그것을 “환원”이 아닌 “분리”라고 비판하면서 그 분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합동된 교단에 잔류했다. 그러한 수는 전국적으로 구 고려측 수의 1/3-1/4에 달했다. 그 결과 고려파는 여러 교수들 및 중견 목사들 상당수를 포함한 수도권 및 전국의 150개 교회를 상실하고 주로 경남에 편중된 지역 교단이 되었다. 그들은 주로 신학교 문제, 이사의 수 반분 등 교회의 “자리들”에 합동 당시의 약속을 승동측이 “다수의 횡포”에 의해 위반했기 때문에 환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교회 분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사유로서 기독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근본적 교리가 부정당할 때라고 못박았다. 그러한 개혁주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고려측의 “환원”에는 어떠한 주요한 교리적 신학적 이유도 제시된 것이 없고 주로 교권적, 개인적, 감정적 사유들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측이 제기했던 불만들, 즉 교권에 대한 합동시 약속들에 대한 승동측의 위반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개혁주의 교회론의 관점에서, 그러한 사유들이 교회 분열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1960년대 고려측과 승동측의 “합동-환원”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그리스도 집단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됨과 형제사이의 교제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추진하는 순수한 교회 일치가 아니고 파당주의적 고려에서 추진하는 교회연합운동은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는다.

목차

1. 머리말
2. 합동의 배경
3. 합동의 성사
4. 고려신학교 복구와 고신측의 “환원”
5. “환원”에 대한 반대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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