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9호
발행연도
2008.9
수록면
69 - 96 (2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1920-30년대 대구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1933년 대구노동자협의회사건을 연계하여 주목한 것이다. 대구기청은 1920-30년대 대구지역 기독청년운동의 중심이었으며, 그 임원진은 3ㆍ1운동에 앞장섰다가 투옥된 경험이 있는 배일적인 인물들이었다. 대구기청은 계몽활동에 주력했으나 1923년 ‘자치교회사건’이 일어나자 활동도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후 1925년 ‘자치파’가 제외된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되면서 대구기청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이 시기 대구지청의 주요활동은 농촌사업이었으나, 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면 단독 또는 연합으로 관심을 갖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대구기청의 주요활동은 농촌사업이었다. 그런데 1933년 대구노동자협의회사건이 불거지면서 대구지역 학생ㆍ청년들 22명이 당국에 검거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그 중 상당수가 기성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인 대구교회의 교인으로 짐작되며, 이들은 대구기청 회관에서 회합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사건 연루자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지하활동을 계획하고 선전물을 발간ㆍ배포했다. 비록 이들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이들은 집단적ㆍ실천적 차원의 기독교사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협의회사건 연루자 중 이재복ㆍ최문식 등은 이후에도 대구기청은 물론 대구교 계에서 계속 활동했다. 그러다 해방공간에서 이들은 다시 좌익계열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1930년대에 꿈꾸었던 기독교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목차

1. 머리말
2. 1920년대 대구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자치파’ 지도부의 이탈
3. 1930년대 대구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대구노동자협의회사건’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