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균섭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16집
발행연도
2010.6
수록면
609 - 644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정조는 스스로를 ‘군사’ 또는 ‘만천명월주인옹’으로 표방하면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동시에 만백성의 스승이기를 자처하였다. 정조의 통치기간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학문체계가 흔들리는 위기의 시대였다. 당대에는 성리학의 빛을 잃은, 불순한 문체와 학문경향이 크게 유행하였다. 정조가 특히 당황했던 것은 믿었던 신하 이상황?남공철?김조순?심상규?박지원 등이 모두 소품문체에 빠졌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들에게 소품문체를 벗어나 순정문체를 추구할 것을 다짐하는 반성문을 제출하도록 명을 내렸다. 정조는 제출된 반성문을 일일이 점검하고 난 후 관보를 통해 그 내용을 공개하였다. 이는 반성한 내용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였다. 정조는 별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성품의 문제를 넘어 정학의 복원이라는 교육과제의 실천에 전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막후정치의 미학을 활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남인은 주로 서학을 추구하였으며 노론은 이를 문제삼고 공격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정작 서학을 공격했던 노론은 소품문체에 빠진 자들이 많았다. 정조가 노론을 향해 반성문 작성과 제출을 요구하여 이들의 학문경향과 행보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은 것은, 사실상 노론의 남인 공격을 차단하는 효과를 염두에 둔 측면이 있다. 이렇게 정조의 당시 학문체계에 관한 대응책은 조선후기 교육사상사의 관점에서 특징적인 지점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목차

요약문
1. 머리말
2. 검열의 정치, 반성의 교육
3. 정치적 해법, 교육적 대응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0-911-003122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