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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배항섭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33호
발행연도
2008.11
수록면
337 - 37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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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시기 조선인의 러시아인식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조선 정부의 차관지원과 군사교관 요청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환궁한 직후 일본이 러일 간의 협정문을 공개하면서 국왕과 관료들의 러시아인식은 악화되어 갔다. 그 협정문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이 우호적이지 않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왕이 러시아 공관에 머무르던 동안 러시아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는 나라로 묘사하던 『독립신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독립신문』의 논조 변화는 영국 정보국과 뉴스공급 협정을 맺은 3월 초 이후 영국, 그리고 일본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정보들이 속속 입수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7년 4월 외무대신 로바노프의 후임으로 무라비에프가 취임하면서 러시아의 조선정책도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1897년 9월 슈페이에르가 부임한 후 조선에 대한 간섭이 더욱 강화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조야의 반감과 비판이 고조되어 갔다. 또 일본과 영국으로부터 러시아에 관한 과장된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독립신문』에서는 이러한 정보들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침략행위가 과장되어 있는 반면,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영국은 조선독립을 지켜주는 나라로 이해되었다. 이관파천시기의 논조와 비교할 때 러시아와 영국ㆍ일본에 대한 인식이 극적으로 반전된 것이다.
이후 러시이의 강압적 정책과 『독립신문』에 대한 탄압, 이권침탈이 이어지자 독립협회에서는 1898년 3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반러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은 해임되어 철수하였고,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러시아가 이외 같이 전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지위를 축소시킨 것은 무엇보다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 목표를 만주로 돌리면서 조선문제로 인한 영국 및 일본과의 갈등을 피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 내지 중립적 보도 태도를 취하던 『독립신문』의 러시아 인식까지 급격히 반전한 원인으로는 우선 러시아의 조선정책이 강압적으로 변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영국발 혹은 일본발 정보원에 근거한 경향이 컸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이는 이 시기 『독립신분』의 정세인식이나 대외인식이 영국과 일본에 편향된 정보망에 갇혀있었음을 말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아관파천 시기의 러시아 인식
3. 환궁 이후의 러시아 인식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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