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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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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영애 (경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65號
발행연도
2010.3
수록면
73 - 10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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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상의 배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은 항상 동북방향에 북방 多聞天이 위치하고, 손에는 탑을 들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 ‘탑’을 든 사천왕상의 위치도 동북 방향이 아닌 서북 방향에 위치하게 된다. 이 글에서 해결하려는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갑자기 달라진 조선시대 사천왕상 배치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둘째, 배치가 달라진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존명에 관한 것이다. 통일신라, 고려 시기에는‘탑을 든 천왕’이 분명 ‘북방 다문천’이지만, 위치가 달라진 조선시대의 탑을 든 천왕도 여전히 ‘북방 다문천’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우선 첫 번째 문제, 즉 조선 초기에 왜 고려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배치를 보이는 사천왕상이 등장하는가에 관해서는 明永樂帝가 1417년에 편찬한『명칭가곡』變相版畵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名稱歌曲』변상판화는조선초 1,300부 이상이 유입되었다. 이후조선은『명칭가곡』을전국에 배포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외우도록 하였다. 실제로『명칭가곡』변상판화를 범본으로 하여 새롭게 판각한 수많은 변상판화들이 남겨져 있어 이를 입증해준다. 판화뿐만 아니라 불화, 조각, 사리기 등을 막론하고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변상판화의 사천왕상과 동일한 배치를 보인다.
두 번째 문제는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존명에 관한 것이다. 관련 학자들은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탑을 든 천왕은 예외 없이 ‘북방 다문천’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비록 위치는 바뀌었어도 ‘탑을 든 천왕’을 여전히 ‘북방 다문천’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탑을 든 천왕’=‘西方廣目天王’이라고 적고 있는 십여 종류의 예들이 특정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고, 시기도 300여 년에 걸쳐져 있어 이들을 모두 작가의 오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15세기 明代毘盧寺벽화의 사천왕상도 동일한 존명이어서 사천왕상 존명 변화는 명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도 ‘탑을든천왕=서방광목천왕’, ‘ 비파를든천왕=북방다문천’으로 인식하였음을 알수있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도상의 변화는 조선 초에 유입된『명칭가곡』변상판화에 기인한 것이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연구처럼 조선 초 사천왕상의 변화가 티베트교 사천왕상 도상이 조선에 직접적으로 유입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조선시대 사천왕상 도상에서 보이는 티베트교 사천왕상의 특징은 티베트불교의 중요한 후원세력이었던 영락제가 제작한『명칭가곡』변상판화의 특징과 일치하고 있어, 명을 통해 받은 티베트교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사천왕상의 존명 역시 명대 사천왕상의 존명과 일치하고 있어,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사천왕상 도상의 변화양상
Ⅲ. 조선 초 對明외교와 1417年作『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의 파급효과
Ⅳ. 조선시대 사천왕상 도상변화의 원인과 사천왕상의 존명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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