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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榮官 (國立濟州大學校 人)
저널정보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목간과문자 제7호
발행연도
2011.6
수록면
149 - 167 (1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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諾思計墓誌銘은 지금까지 알려진 墓誌銘가운데 당에서 활동하다 長安에서 생을 마감한 유일한 渤海人의 墓誌銘이다. 諾思計는 百濟遺民이 아니라 渤海15府의 하나였던 扶餘府의 大首領出身이다. 中國學界에서 그를 백제유민이라고 잘못 이해한 것은 그의 출신지인 渤海의 扶餘府와 百濟의 首都였던 扶餘를 동일한 곳으로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唐에 投降한 후 武將으로 活躍하여 海外에까지 名聲을 날렸고, 出世하여 唐의 有力한 官僚와 貴族들의 居住地였던 長安의 平康坊에 살았다. 묘지명에 그가 특별히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가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고구려의 후예로서 발해인이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諾思計는 비록 당에 투항해 무장으로 활동하면서 고위관직에 오르고 盧庭賓이라는 姓과 이름을 당 황제로부터 하사받았지만 발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이는 墓誌銘의 首題에 당에서 받은 관직과 당 황제로부터 받은 성과 이름이 아닌 “故投降首領諾思計”라고 씀으로써 발해의 수령인 낙사계임을 밝히고 있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墓誌銘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734년 4월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것으로 『文苑英華』에 기록된 盧庭賓이 발해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큰 공을 세워 출세가도를 달려 高官이 되었지만, 748년 5월 갑자기 병이 나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당시 그의 나이가 몇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墓誌銘의 撰書者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諾思計墓誌銘은 당에 들어와서 활약한 발해인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墓誌銘 연구의 現況
Ⅲ. 墓誌의 判讀과 飜譯
Ⅳ. 諾思計의 行蹟
Ⅴ.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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