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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집
발행연도
2009.4
수록면
271 - 313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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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성수는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조선총독부가 관여하거나 조직한 행사나 단체에 적잖이 이름을 올렸다. 또 1943년 하반기부터 징병이나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글과 인터뷰를 여러편 남겼다.기록이 명백한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이에 대해 일찍부터 명의도용이나 조작을 말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검토 결과 오히려 그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볼 정황을 찾을 수는 없었다.해방 후의 표현을 빌면‘사업의 유지’를 위해 ‘피동적’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김성수가 민족주의 지도자의 이미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유지하려던 사업은『동아일보』였다.『동아일보』는 일장기말소사건 이후10여 개월동안 저항했지만 ‘폐간불사’를 고집하는 조선총독부에게 결국 백기를 들었다. 중일전쟁 이후『동아일보』를 향한 조선총독부의 압력은 김성수에게로 향했다. 복간은 되었지만 언제 다시 탄압이 올지 모를 상황이었으므로 예전의 자세를 버리고 비로소 김성수는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했다.한 번의 협력은 김성수의 묵인과 방조,또는 체념 속에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김성수를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주머니속의 카드처럼 여겼고, 이내 유명한 친일파 옆에서 김성수의 이름을 찾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다.
‘부득이했다는’ 김성수의 학병 강요 행위는 사람마다 평가를 달리 했다. 평소 그의 언행을 접했던 보성전문 출신의 제자들은 그의 강연이나 글에서 본의를 발견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성수의 행위는 단순히 보성전문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주로『매일신보』나『경성일보』를 통해 조선을 넘어 일본제국의 판도 안으로 전해졌다. 존경해 마지않던 조선사회의 명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학병을 지원하라는 글과 말을 쏟아내는 상황에서‘설마 그럴 리가’라고 느낀 독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반드시 그 기사 때문에 학병을 지원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원자들의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좌절감과 실망감만은 충분히 기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회의 명사들을 무리해서라도 신문 지면에 등장시킨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피동적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쌓아 왔던 명망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일제의 의도를 방조했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가 지키려 했던 ‘사업’의 평가는 또 다른 문제다.

목차

1. 머리말
2. 일제말기 김성수의 주요 친일 행적
3. 김성수 친일행위 변호론의 재검토
4. 맺음말-명망과 책임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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