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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병곤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29호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7 - 3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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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각국이 지닌 시조관은 다양하고 때에 따라 새로운 인물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곧 고구려 시조 朱蒙은 건국시조로서의 위상을 멸망기까지 꾸준히 유지했지만, 백제 시조 溫祚 그리고 신라 시조 赫居世 등은 시대 변천에 따라 시조로서의 사적 위상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지닌 종교적 권위의 완성도(天神과 水神의 결합)가 높았다. 더욱이 시조관이 확립된 소수림왕대의고구려는 중국의 天下觀과 구별되는 자국 중심적인 고유의 천하관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고등종교인 불교나 유교 등이 도입되었지만 기존의 시조관에 영향을 줄 만한 새로운 시조 관념이나 제사 체계의 수용은 없었다. 그러므로 주몽이 지닌 시조로서의 사적 위상과 종교적 권위는 멸망기까지 확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백제는 시조와 건국자가 兩立되는 점이 주목된다. 중국 정사로서 唐代 편찬된?『周書』?에는 始國者로 仇台가, 『隋書』?에는 ‘先’으로 東明과 시국자로서 구태를 구분하여 기술했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건국의 주인공인 온조를 시조라 명기하였지만, 동시에 온조가 즉위 원년 범부여족의 시조 동명을 모신 東明王廟를 건립했음과 역대 왕들이 이에 拜謁한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중국 기록에는 건국자가 구태로 기록되어 국내 기록과 달라 논란이 많다. 이는 백제 왕실이 실질적으로 인정한 건국자는 온조였지만, 사비시대에 이르러 중국적인 예제의 도입 속에 시조관(太祖觀의 도입)의 변화와 더불어 일시적으로 구태가 새로운 시국자로 설정되었던 결과이다.
신라는 박씨 집단의 시조인 혁거세를 건국시조로 삼아 그를 모신 始祖廟를 설치하고 치제하였다. 그러나 이후 김씨 집단이 왕권을 확립하고, 김씨 시조 閼智를 모신 神宮을 설치하여 기존 혁거세와 시조묘의 위상을 대치시켰다. 더 나아가 중대 초에는 중국적 예제의 도입 속에 새로운 ‘先’이자 태조로 星漢을 추존하였고, 중대 말에는 성한을 대신하여 金姓으로써 始登之王한 味鄒王을 시조로 삼아 오묘의 수위에 배례했다. 이 과정에서 혁거세가 지닌 건국시조의 근본적인 위상이 상실되지 않았지만, 신라는 김씨 왕권의 확립과 국가 제례의 변천 및 중국적 예제의 도입 그리고 이에 따른 새로운 시조관의 출현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알지와 성한 그리고 미추왕 등이 혁거세를 대치하는 시조이자 국가 제례의 주 대상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시조의 다양화가 존재했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高句麗의 始祖 朱蒙(鄒牟)
3. 百濟의 始祖 溫祚와 仇台
4. 新羅의 始祖 赫居世와 星漢·味鄒王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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