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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병곤 (동국대)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3호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37 - 73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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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출범은 후대의 高麗나 朝鮮과 달리 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며 시작되지도 않았고 체계적인 기록 정착 이전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의 건국 기년과 과정은 사실이라기보다 구전과 기억에 의지하던 내용을 후대 정리한 결과일 것이다.
신라인들이 기억하던 斯盧國 형성의 기층집단(육촌)은 衛滿朝鮮 성립 전후에 경주로 유입된 (先來)고조선 유민들로 파악된다. 한편 시조 혁거세는 육촌장에게 발견되어 양육되다가 즉위하여 사로국을 건국하였는데, 誕降者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외래 유민으로 여겨진다. 현 경주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참고할 때, 위만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의 지배를 피해 남하한 (後來)고조선 집단의 장으로 판단된다. 곧 경주에 선래한 고조선 유민이 동일한 유래를 가진 후래민을 받아들여 사로국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모든 기록이 신라의 건국 기년을 BC 57이라 하였는데, 이 해는 고조선 멸망 이후 최초의 甲子年이라는 점이 사로국의 출범과 고조선 유민의 상관성을 신뢰할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연원이 고조선에 있었음을 숙지했던 까닭에 BC 57년을 건국 기년으로 선택하였을 것이다.
혁거세는 건국시조이자 초기 왕족인 박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신라는 상고기 박ㆍ석ㆍ김의 삼성에 의한 왕위 교립이 있었고, 이후 김씨 왕실의 확립과 김씨내에서의 가계 분화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시조묘 제례의 변천(始祖廟→神宮→五廟制)과 더불어 시조관의 다양화(朴赫居世 / 金閼智→星漢→小昊金天氏→味鄒王)도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박씨 시조 혁거세는 건국시조로의 위상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이는 김씨 왕권이 확립된 중고기는 물론 전제왕권기라 평가받는 중대 왕실도 개변할 수 없는 건국관의 확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대 왕실이 소호김천씨를 시조로 주장했음을 참고하면, 그 이전에 국가적 차원의 건국 시조에 대한 사적 정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진흥왕대의 《國史》편찬기 외에 특별히 비정될 만한 시점이 없다.
다만 혁거세의 탄생일은 이설이 존재하는데, 김씨 왕 재위기 이에 대한 관심과 정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박씨 왕 재위기 혁거세 관련 행적의 정리가 누차 있다가, 《국사》 편찬시 정설이 마련되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관련 내용을 모두 사실로 볼 수 없지만 이러한 고유 전승의 기반에는 고조선의 멸망 전후 발생한 유민들이 경주에 누차 정착하면서 사로국을 건립했던 행적이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기초 자료의 정리와 비교
Ⅲ. 기층 집단에 대한 인식
Ⅳ. 건국 시대에 대한 인식
Ⅴ. 건국 기년과 건국관의 정리
Ⅵ.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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