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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태국 (연변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0집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33 - 59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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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는 압록강을 사이 두고 한인들이 쉽게 이주하고 조선시대의 燕行使를 수행하는 商團이 드나들며 조·청 양국 간의 국경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며 조선 북부지역의 採蔘人과 狩獵人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다. 그리고 조·청 양국이 17세기 초반부터 극형으로 다스리던 禁斷조치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의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곳이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점하자 독립운동가들이 이주 대열에 합류하면서 서간도의 한인이주는 가속도가 붙었다.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던 시점인 1911년에 이르러, 서간도 지역에는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서간도 이주한인들은 중국인 농민들과 농경지 선택을 달리하면서 별다른 마찰 없이 현지 안착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귀화입적하지 않은 한인들은 토지소유권을 부여받지 못하면서 대부분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여야 했다. 그러나 서간도 한인사회 내부에 종교단체가 발달하면서 종교신앙생활을 통한 민족공동체가 발 빠르게 추진되었다. 한편 청나라 지방당국의 행정제도가 일찍 정비되고, 중국인 이주도 상당히 활발하여 진척됨으로써 서간도 이주 한인들은 현지인들과의 교류와 협력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11년 柳河縣 鄒家街에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통화현 哈?河, 유하현 孤山子로 학교를 옮겨가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 역군을 배출하는 요람으로 거듭 났다. 서간도 한인사회가 직면하였던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방면에서의 어려운 생활여건은 다른 측면에서 신흥무관학교가 한인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간도 한인사회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신흥학우단는 학교 운영과 지역 계몽의 지도적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낮에는 아동교육을 실시하는 교원으로, 밤에는 지방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교관으로 활약하며 장차 다가오는 독립전쟁을 대비하고 병력을 마련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소학교 교원으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문명과 독립운동정신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신흥학우단에서 발행한 ‘신흥학우보’는 새로운 의식혁명을 불러 일으키는 산실 역할을 자임하며 국가·민족·교육·우정·신앙 등에 대한 언설을 통해 한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진로를 탐색하고자 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서간도 한인사회의 형성
3.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한인사회 지원
4. 한인사회와 신흥무관학교의 운명공동체적 관계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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