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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백승옥 (부산박물관)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8집
발행연도
2011.4
수록면
29 - 5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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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時期 울산지역에는 于尸山國과 屈阿火國이 존재하였다. 이들 小國은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에 新羅에 복속되었다. 이후 울산지역은 신라의 관문이자 대외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유적인 울산 伴驗洞遺蹟에서 보이는 거대한 木珊 시설은 그러한 울산지역의 역사 지리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廣開土王陵碑文에 의하면,400년에 高句麗軍 5만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거쳐 도망가는 倭賊의 뒤를 쫓아 부산?김해지역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 고구려군은 울산지역을 통과한 것으로 보았다. 울산지역의 지리적 여 건과 유적(銀幌里積石塚) 및 출토 유물(太和13年銘石造佛像) 등을 통해서 그렇게 추정하였다. 왜적의 退路는 곧 침입로이기도 하여 울산지역은 왜적이 경주로 침입하는 주요한 루트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日本書紀』에 ‘汗禮斯伐(지금의 울산지역으로 비정)의 毛麻利叱智(堤上)’로 표기된 점으로 보아 제상은 5세기 초 당시의 울산인이었다. 울산사람 제상이 인질 구출을 위해 고구려와 왜로 떠났던 것은 울산지역의 역사 지리적 특수성, 즉 대외 사정에 밝은 곳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고구려군이 울산지역을 그쳐감으로써 당시 울산 거주의 제상은 고구려에 대 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울산지역은 왜의 신라 출입구이기도 하였다. 이에 왜에 대한 정보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5세기대 울산지역의 역사 지리적 성격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그 고고학적 증거가 반구동유적인 것이다. 특히 신라 외항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된 곳이 울산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고대 울산의 동향
3. ‘堤上‘ 설화에 보이는 울산의 성격
4. 맺음말
曰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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