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승태 (세계선교신학대학)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6호
발행연도
2012.3
수록면
5 - 36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8)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05인 사건은 1911년 10월 평북 선천의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 검거로 시작되어, 1912년 9월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항소하여 그 가운데 99명이 1913년 3월 무죄 석방되었으며,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윤치호ㆍ양기탁ㆍ이승훈 등 6명도 1915년 2월 일본 천황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재한 선교사들과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의 선교본부들의 활발한 외교적 대응과 압력이 크게 작용하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더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재한 선교사들은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을 미국의 선교본부와 친지들에게 알리고, 총독부 관리들을 찾아가 구속자들을 변호하였다. 그리고 일제 경찰의 예비 신문과정에서 피의자에 대한 고문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대한 항의와 조사를 요구하였다. 1912년 1월에는 선교사 대표가 데라우치 총독을 직접 면담하였고, 1912년 2월에는 YMCA 총무 질레트가 아카시 경무총감을 찾아가 피체된 윤치호의 상황을 알아보고, 회장 저다인과 함께 장문의 이 사건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5월 22일 국제 YMCA 대표이자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 계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모트에게 계속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주도록 요청했다.
105인 사건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한 선교부는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외에도 미북감리회 선교부, 미남감리회 선교부, YMCA,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 영국 선교연합회 등이었다.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은 이 사건이 일제 경찰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이후부터는 일본대사관과 직접 교섭하거나 여러 선교부들과 연합하여 대책을 강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였고, 재판 직전에 이 사건 관련 편지와 공문들을 언론에 공개하여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심 재판에서 105인에게 유죄가 선고되자, 선교부 연합으로 비밀회의를 갖고, 그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작성하여 1912년 11월 20일 출판ㆍ공개하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정식의제로 채택하고, 각국 위원들을 통해서 해당국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 압력을 행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영국 선교연합회에서도 영국 주재 일본 대사관을 찾아가 이 사건에 대한 공정한 처리를 요구했다.
이러한 국제 여론의 압력을 받은 일제의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은 보다 신중하게 이루어졌고,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105인 가운데 99명에게 1913년 3월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하고, 윤치호ㆍ양기탁ㆍ이승훈 등 6명에게만 유죄를 선고했다. 총독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 판결이었다.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들은 판결 이유가 법리적ㆍ논리적 타당성이 없으므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결국 최종 기각되어 윤치호 등 6명에 대한 형은 확정되었다. 그렇지만, 이들도 형기를 다 채우기 전인 1915년 2월 일본 천황의 특사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목차

1. 머리말
2. 재한 선교사들의 대응과 연루된 선교사들
3. 미국 선교본부들의 대응
4.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의 대응
5.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9)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200-001778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