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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延敏株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1집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81 - 11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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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일본관계의 교류상의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違例와 無禮와 같은 명분론적인 외교의례와 年期違犯이라 하여 발해사의 年期문제이다. 양국관계는 이를 일본측이 제기하고 발해가 대응하는 가운데 전개된다. 8세기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소중화의식으로서 한반도제국을 일본의 번국으로, 그 사절단을 번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는 일본을 동등하게 때로는 舅甥관계, 형제관계를 내세우며 우월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중화주의의 충돌로서 발해 와 일본이 상대를 보는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발해에 대한 인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패망 전후의 일본에 온 고구려사, 그 후 고구려유민으로 성립한 보덕국의 사절, 일본천황의 신분적 질서하에 포섭되는 고구려유민의 존재가 있었다.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의 발해의 일본에 대한 강한 메시지는 자연히 고구려와 발해가 중첩되면서 일본으로 하여금 발해와 발해사를 번국, 번국사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발해는 천손으로서의 왕권의 자부심을 과시 하며 수없는 「無禮」를 반복하였다. 국서의 표기문제가 매번 지적되었지만 발해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商旅’인식에서 나타나듯이 발해는 교역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빈번히 내항하였다. 발해인의 눈에 비친 일본은 거대한 교역시장이었다. 일본측에서는 신라와의 공적관계가 단절되고 견당사가 종료되는 9세기 이후가 되 면 발해는 유일한 통교국이자 문물수입처였다.
양국은 상호인식의 차이, 외교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장년의 교류가 중단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부적 조건과 국제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경계한다는 공동의 인식이 있었고, 특히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쟁의식은 너무도 커 발해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왕권내부의 주요 과제였다.

목차

국문초록
1. 서언
2. 渤海·日本 교섭기의 相互認識
3. 國書의 형식을 둘러싼 名分論
4. 「商旅」인식과 年期問題
5. 결어
참고문헌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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