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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문자 (상명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381 - 41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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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7년 전쟁 기간 중 5년 1개월을 ‘휴전’상태에서 조선과 일본, 일본과 명 사이에서 강화교섭, 즉 외교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진행되어왔던 ‘일·명, 조·일강화교섭’가운데 특히 조선왕자 송환문제에 깊게 관여했던 기요마사의 활동을 중심으로(서생포 회담)그가 조선과의 강화교섭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 동시에 왕자 송환문제가 이후 전쟁 중의 강화교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일본이 조선을 재침한 배경과 ‘조선 왕자의 일본 不參’이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는지 고찰하였다.
그 결과 일본 측은 1593년 평양성·벽제관 전투의 패전으로 무기와 병량 부족이 극심하여 明 정복보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병량미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경상도 해안지역에 축성을 해야 했다. 이처럼 조선의 남부지역에 거점을 두고서 조선을 攻略해야 하는 전략으로 변경됨에 따라 히데요시는 명이 요구하는 화의조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한성 철수와 조선 왕자의 송환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자의 송환문제는 明측의 끊임없는 재촉과 戰況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마츠나리(石田三成)의 결단과, 히데요시(秀吉)의 전략변호에 의해 해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지금까지 총동원해서 감행해 왔던 침략전쟁이 수포로 돌아가고, 국내의 정세마저도 불안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따른 돌파구로서 재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는 일본의 승리와 자기의 관대함을 국내에 선전하기 위해서 다시 재침을 결심한 것이고, 조선을 공격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전쟁 발발의 원인을 조선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자가 일본에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선왕자가 來日하지 않았다던가, 조선통신사가 늦게 도착했다던가, 신분이 낮은 관리들이 왔다던가 하는 명분을 내세워서 전쟁을 다시 개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재침략의 배경으로 논의되어 왔던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임명 거부설’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일본군의 한성철수와 조선왕자 송환문제
3. 조선과의 강화교섭-서생포회담을 중심으로-
4. 강화교섭의 파탄과 일본군의 재침략
5. 나오며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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