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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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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우연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44輯
발행연도
2012.11
수록면
111 - 13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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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중기 대외 확장사 연구에서 한반도 중·남부 진출과 더불어 遼東 확보가 집중 조명돼왔다. 요동은 이른 시기부터 동북지역의 중심지로서, 오랜 기간에 걸쳐 벽화분 축조 전통이 존재했음에도, 고구려가 지배한 260년에 걸쳐 단절되어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현상에 주목해, 시론차원에서 해석해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요동지역을 약탈 대상으로 삼아오다가, 5세기 초,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요동 정치세력의 공백상태를 이용해 영역으로 확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북연 주민과 같은 중국 유이민 집단을 안치시켜 경제활동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경제수취 기반으로 이용했다. 또 후기에 이르러서는 요동에 山城과 같은 대량의 방어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대 隋·唐 투쟁의 전초기지로 조성하였다.
요동지역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벽화분 축조 전통이 이어지다가, 3~4세기 빈번한 전란으로 인해 인구가 주변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벽화분 문화가 遼西와 고구려로 전파되고, 정작 요동에서는 멸절된다. 고구려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벽화분 문화를 수용하여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벽화분 묘제를 형성하기 시작하며, 서쪽으로 집안지역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요동지역을 단지 경제 혹은 군사기반으로 활용하다 보니 벽화문화 역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주된 원인은 요동 지방세력 형성을 방지하기 위한 지배방식과 갈라놓을 수 없다. 결국 요동지역에 벽화분을 축조할 만한 지방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못하면서, 벽화분 전통이 지속적으로 단절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遼東지역사의 전개와 고구려 중기 對 요동 관계
Ⅲ. 요동의 壁畵墳 축조 전통과 고구려 중기 벽화분 묘제의 형성
Ⅳ.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참고문헌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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