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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규희 (서울대)
저널정보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한국문학과예술 제10집
발행연도
2012.9
수록면
147 - 194 (48page)
DOI
10.21208/kla.2012.09.1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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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도의 가장 뛰어난 경관인 팔경(八景)을 지정하는 것은 왕실인사를 중심으로 한 최고위층 문사들의 몫이었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에는 조선전기에 선정된 ?신도팔영(新都八詠)?, ?한도십영(漢都十詠)?, ?남산팔영?의 세 편 외에 단 한 편의 새로운 제영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세손인 정조가 지은 ?국도팔영(國都八詠)?이었다. 그런데 정조의 ?국도팔영?은 이전의 제영에서 명승으로 주목하지 않았던 삼청동, 필운대, 청풍계, 세검정 등 서울 북리(北里)를 팔경으로 꼽고 있어 어느 시점에 한양의 최고 경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특히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사당이 있는 안동 김문의 세거지를 국도팔경으로 꼽은 점도 주목된다.
이 논문에서는 이렇게 한양 북리의 명승들이 세손인 정조에 의해 국도팔경으로 인식되게 된 배경을 추적하며 이것이 북리의 명승명소를 『장동팔경첩』과 같은 일련의 화첩으로 처음 그렸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 정선의 명승명소도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한양의 북촌이 ?국도팔영?의 제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명승명소도가 오직 정선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만 그려진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그림의 수용자가 누구였으며, 왜 소장하고자 하였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선의 대표작인 ‘기미춘사(己未春寫)’의 관서가 적혀있는 간송미술관 소장 <청풍계도>의 화풍과 제작시기, 그림의 수용자 등을 새롭게 조명하여 여러 폭이 전하는 <청풍계도>의 서로 다른 층위에 관해서도 논할 것이다. 이를 통해 청풍계를 위시한 한양 북리가 서울 제일의 명승명소로 인식되어 가던 정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조선전기 한도십영(漢都十詠)에서 조선후기 국도팔영(國都八詠)으로
2.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경화세족들의 명원(名園) 조성과 장동 김문 집안의 북리(北里) 명승명소화
3. 18세기 전반 이병연 일파를 중심으로 한 시회(詩會)와 유상(遊賞)의 공간으로서의 한양 북리(北里)
4. 정선의 ‘己未春寫’ <청풍계도>와 청풍계 주인 김영행
5. 정선의 한양 명승명소도와 국도(國都) 명승의 재인식
6.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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