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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Jong-soo, Han (Chung-Ang University)
저널정보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다문화콘텐츠연구 다문화콘텐츠연구 제 16집
발행연도
2014.4
수록면
219 - 250 (32page)
DOI
10.15400/mccs.2014.04.1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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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세기 明의 멸망과 淸의 새로운 부상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변화되는 상황에서 조선은 1659년과 1674년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禮訟論爭의 원인과 내용을 분석한다. 조선 17대 국왕인 孝宗은 仁祖의 次子로서 長子인 昭顯世子의 죽음으로 인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왕위계승 원칙상 長子이자 ‘嫡統’이 아닌 次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이다. 이는 이후 효종의 喪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喪에 효종 어머니인 조대비의 服喪에 기간에 대한 두 차례에 걸친 논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른바 2차에 걸친 예송논쟁이다.
17세기 당시 예송논쟁을 주도했던 西人과 南人은 정치적?사상적으로 효종의 正統性과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즉 ??朱子家禮??가 도입된 후 西人은 ‘王者禮’와 ‘士大夫禮’가 동일하며, 왕위계승 원칙상 적통인 소현세자의 喪에, 조대비가 이미 3년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효종의 國喪에는 朞年服을 착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남인은 ‘王者禮’의 특수성을 주장하였다. 효종은 차자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정통성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효종상과 효종비의 상에 조대비는 ‘적통’에 맞는 복식을 착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왕의 정통성 인정 여부에 따라 복식기간을 두고 첨예하게 서인과 남인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서인과 남인간의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아닌 것이다. 즉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연장선상에 있는 논쟁이었다. 이렇듯 예송논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王權과 臣權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본고에서 필자는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明의 멸망과 ?의 성장 등에 주목 하였다. 명 멸망으로 인해 ‘중화주의’가 오랑캐인 청의 성장으로 ‘조선중화주의’로의 사상적 강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2차례의 예송논쟁에 주목하고자 한다. 남인과 서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논쟁과 함께 사상적인 내용을 주목하고자 한다.

목차

Abstract
1. Introduction
2. Inception and Demise of Old Order
3. The Mourning Ritual Controversy in 1659 and 1674
4. The Legitimacy of the King’s Throne
5. Conclusion
Bibliography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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