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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崔英成 (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0호
발행연도
2010.12
수록면
179 - 21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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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라 무장사비의 書者를 밝혀 신라 서예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종래 무장사비는 王羲之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보는 측과 金陸珍이 글을 짓고 글씨까지 撰幷書 보는 측의 견해가 대립하여 왔다. 집자비 설은 청나라 금석학자 翁方綱이 주장한 뒤 식민지 시기 일본 官學者들에게 계승되었다. 광복 이후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인습적으로 통용되면서 집자비란 인식이 오늘날까지 학계 일반에 널리 퍼져 있다. 필자는 집자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답사를 한 뒤 과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 450여 자를 판독하고 字型을 분석하였다. 무장사비가 왕희지 글씨와 흡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글자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고, 왕희지가 남긴 글씨에 없는 글자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집자비와는 달리 글씨가 매우 고르고 조화를 이루었다. 게다가 1914년에 발견된 비편에서 `□□□金陸珍奉 교□` 아래 있는 `皇龍寺……` 운운하는 대목은 무장사비의 글씨를 쓴 사람이 김육진이 아니라 황룡사 스님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글씨를 쓴 사람을 밝히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된다. 洪良浩나 金正喜 당시에는 이 비편을 볼 수 없어 서자를 판단하는데 활용되지 못하였다. 또한 발견 이후 일본인 학자들은 보아 넘기거나 부각시키지 않으려 하였고, 광복 이후 우리 학계에서는 이에 주목한 학자가 없었다. 이러한 학계 분위기 속에서 비편을 재검토하여 서자를 신라의 황룡사 스님으로 추정한 것은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藏寺와 ?藏寺碑
Ⅲ. 3개 碑片의 發見과 朝ㆍ淸 학계의 관심
Ⅳ. 集字碑 여부와 書者 문제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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