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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용한 (순천향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18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271 - 30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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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충주군 광무양안과 여주군 광무양안을 이용하여 여주와 충주의 궁방전을 분석한 것이다. 여주에는 10개궁, 충주에는 5개 궁의 궁방전이 있다. 그러나 여주와 충주의 궁방전은 전체 토지의 1.87%와 0.2%에 불과하다. 이는 갑오개혁으로 무토 궁방전이 철폐된 결과였다.
궁방전은 궁방에 따라 3-4개면에 집중배치되었다. 다른 궁방전, 능위전, 역전과 같은 비중이 큰 토지와 겹치지 않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군현 내부의 지역별로 토지와 중복을 피해 민의 부담과 행정에서 균분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궁방전의 구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신설궁방과 능위전과 1사7궁과 같이 연륜이 오래된 토지의 입지와 경작자의 구성이다. 능위전과 수진궁, 명례궁의 토지는 토지 대부분이 3등전 이상의 토지에 집중되어 있고, 군현의 평균분포를 크게 뛰어넘는다. 이것은 민씨 세도가의 대지주들의 토지보다도 높은 것이다.
반면 신설궁인 영친왕궁은 5,6등전이 80%일 정도로 열악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경작인의 재산상태도 매우 낮다. 경작자의 평균 소유량이 다른 궁방전이나 대지주의 절반 이하이다. 무전민이 전체 경작자의 51%이며, 0.5정보 이하 토지 소유자가 81%이며, 전체 51%가 무전민이다. 평균 차경지도 낮으며, 다른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영친왕궁의 토지만 경작하는 전속율도 제일 높다.
영친왕궁의 토지와 경작자의 낮은 수준은 신설 궁방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영친왕궁은 설립초기부터 매입을 자제하고, 축보, 개간, 간척사업 같은 대규모 영농사업을 통해 토지를 확보했다. 여기에는 과시적이고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한제국은 1894년 농민전쟁의 경험을 통해 탄생했다. 광무 양안 역시 그런 문제의식으로 수행한 사업이었다.여기에 더해서 황제와 왕실의 권위와 이미지 역시 중요한 관심사였다. 궁방전의 경영은 황실의 이미지와 농민이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곳이었다.하등의 토지에 궁방전을 개설하고, 경작자를 최하층의 빈농과 무전농으로 충당하며, 개간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빈민들의 보호자로서 온정적인왕의 이미지와 혁신적인 경영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개간과 간척사업은 상당한 재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반 개인들이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최대 부호인 황실이 이런 사업에 앞장서는 것은 농민에게 황실의 능력과 필요성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주는 민씨 세도가의 본관지이면서 전통적으로 재경 권세가와 왕실의 토지가 많고 이들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빈민층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런 지역에서 궁방전을 통해 빈민층에게 혜택을 베풀고, 남다른 자금지원과 경영방식을 통해 토지의 질과 농민 생활의 장기적인 성장과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지역사회의 안정과 황실 지지세력의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군(郡)의 토지구성과 궁방전
Ⅱ. 궁방전의 분포와 입지
Ⅲ. 위전과 궁방전의 경작자
맺음말 - 대한제국기 궁방전 경영의 새로운 모색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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