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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성주현 (청암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48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159 - 195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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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은 당시 ‘實로 空前한 慘劇’이라고 할 정도로 참혹했다. 식민지 모국에서 일어난 지진임에도 불구하고 관동대지진은 식민지 조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제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이를 역이용하여 도쿄를 비롯한 관동 일대에서 조선인을 학살했다. 이러한 조선인 학살사건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적 감정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관동대지진이 식민지 조선에 알려지자 언론은 가능하면 사실적 보도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이는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인 학살이 10월 중순까지는 전혀 보도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의 조선인을 위한 구제활동을 전개했다. 초기의 구제활동은 일본인사회, 관주도로 전개되었다. 즉 구제활동을 ‘내선융화’라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언론은 구제활동을 독려했다. 이에 경성에서는 의연금조성회와 조선인구제회가 각각 조직되어 의연금을 모금하는 등 구제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경성을 비롯하여 인천, 대구, 부산, 전주 등 일본인사회가 형성된 대도시에서 우선적으로 일본인, 관 중심의 구제회를 조직하는 한편 구제활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구제활동을 확산되어 각지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제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구제활동은 대체로 1923년 9월에 한정되었고, 10월에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관동대지진은 당시에는 국내에서 구제활동과 추모행사 등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1년 후인 1924년부터는 사실상 잊혀진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점은 식민지 모국과 달리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인식 아래 일제의 통제에서 비롯되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관동대지진에 대한 보도와 인식
Ⅲ. 구제회 조직과 의연할동
Ⅳ. 관동대지진의 기억과 전승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 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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