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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현강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4호
발행연도
2016.3
수록면
209 - 23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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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로버트 코잇은 1878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에서 태어나 솔즈베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남장로교의 데이비슨대학과 루이빌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907년 맥클렌버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 지명을 받았다. 1908년 미시시피 주 출신의 세실 우즈와 결혼한 그는 1909년 3월 목포에 도착하였다.
남장로교의 광주스테이션에 부임한 지 불과 얼마 후에 선임 선교사 클레멘트 오웬이 장흥지역 교회들을 돌보다가 격무로 순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선교부는 광주에서 거리가 먼 전남 동남부 지역을 관리할 새로운 선교거점을 순천에 세우기로 하고 그 일을 코잇과 프레스턴에게 맡겼다. 프레스턴이 미국에서 스테이션 건설을 위한 기금 마련에 힘썼다면, 코잇은 그 선교구내의 조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부지 매입에서 건물 신축, 조경, 사후 관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순천스테이션은 그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코잇은 현장 선교사였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광주에 살면서 그는 오웬의 영역이었던 전남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들을 돌보았다. 이때 전국 전도사업이었던 ‘백만명구령운동’에 가담하여 쪽복음·전도지 배포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문서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신의 선교사역에서 비중 있게 활용하였다.
1913년 4월 순천으로 이주한 그에게 두 아이의 죽음은 너무나도 비통한 일이었다. 하지만 코잇 부부는 낙심하지 않았고, 선교현장을 떠나지도 않았다. 코잇 부인은 오히려 주변의 선교사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코잇의 17년 순천 사역은 1922-23년의 안식년을 기준으로 크게 1기(1913-1922)와 2기(1923-1929)로 나눌 수 있다. 그는 순천 동부구역인 인구 15만 명의 구례와 광양군 30여 개의 교회들을 세우고 순회·관리하였다. 장막전도는 그의 주된 포교 방법이었다. 또 8개의 교회초등학교와 3개의 유치원에서 모두 250명의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측면 지원하였다. 그는 몇 차례 선교잡지 기고를 통해 교회초등학교 운영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사역 1기가 구례와 광양의 교회들을 세우는 시기였다면, 2기는 그 교회들이 지속되도록 힘을 불어 넣은 기간이었다.
그가 설립을 주도한 순천스테이션 영역은 1929년 현재 1,350명의 교인수에 93개의 신앙공동체가 있었고, 순천노회를 협력하고 있었다. 1929년 2월 코잇은 심한 독감에 걸렸고, 시간이 지나도 병세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동료들의 권유로 그 해 10월 미국으로 돌아가 투병 생활을 하다가 결국 1932년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청소년기의 추억이 서려있는 솔즈베리에 묻혔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로버트 코잇의 출신과 배경
Ⅲ. 광주에서: 순천 지역 순회 사역 및 스테이션 조성(1909-1912)
Ⅳ. 순천에서 ①: 구례와 광양, 교회초등학교와 장막전도(1913-1922)
Ⅴ. 순천에서 ②: 구례와 광양, 사역의 지속과 득병 귀국(1923-1929)
Ⅵ.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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