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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안영 (선문대학교)
저널정보
인문사회예술융합학회 문화와융합 문화와융합 제38권 제4호(통권 제42집)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145 - 164 (2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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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李鼎元, 1749-1812)은 1800년 유구책봉사의 부사로 정사 조문해(趙文楷, 1761-1808)와 유구를 방문한다. 1800년 부사로 참여한 그의 사행단은 3월 30일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9일 복주성(福州城)을 지나 5월 12일 유구에 도착하고 11월 3일 귀환하는 여정이다. 사절의 규모는 정사, 부사, 통관 등을 포함해 400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원은 유구 사행을 통해 『사유구기』외 2권을 남겼는데 『사유구기』는 총 6권으로, 1802년에 간행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책봉사의 의무를 가지고 갔지만 비공식적인 즉 외국의 시문과 풍광에 흥미를 느끼는 기록도 보인다. 이정원의 사절은 복주까지 육로를 이용하고 복주에서부터는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해 유구에 도착한다. 유구를 도착하면서부터 귀국하는 날까지 백관(百官), 법사(法司), 자건관(紫巾官) 등 각 관원들의 영접의례를 끊임없이 받게 된다.
유구에 도착해 공식 임무인 책봉의 예를 행하는 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사절은 갈 때는 하지 이후에 서남풍이 부는 것을 기다려 복주를 출발했으며, 올 때는 동지 이후에 동북풍이 부는 것을 기다려 유구를 출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구에서 3-4개월 정도 체재하는 일이 대다수였다. 이정원은 5개월 간 유구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에 관리 등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는 유구의 문풍(文風), 생활, 고구마, 호랑이 전설 등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기도 하며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이정원은 유구 사람들이 쓰는 언어나 생활을 옮겨적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심은 유구 사행 이후 편찬한 『유구역(琉球譯)』이라는 연구서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한편 백준(柏葰, ?-1859)은 1843년 조선의 왕후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12월 20일에 백준을 정사, 항흥(恒興)을 부사로 임무를 부여한다. 이 사행은 1844년 1월 12일에 북경을 출발하여 2월 7일에 압록강을 건너, 2월 21일에 한양에 입성하여 조문을 한 뒤 사흘만인 2월 24일에 귀국길에 올라 4월1일에 북경에 돌아오는 여정이다. 사행 규모는 정사, 부사, 통관 등 대략 21-22명 정도로 추정된다. 백준은 조선 사행을 통해 『봉사조선역정일기(奉使朝鮮驛程日記)』와 『벽림음관초존(薜箖吟館钞存)』을 남겼다. 『봉사조선역정일기』는 그 해 5월에 출간한 여행일기이며, 『벽림음관초존』은 북경-서울을 오가는 사이에 지었던 시를 모은 것이다. 백준의 사절은 의주에서부터 시작해 정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여섯 군데에서 원접사(遠接使), 차비관(差備官), 기재관(記載官) 등 조선 관원들의 영접의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백준은 3박4일 만에 공식 임무를 마무리하고 귀환한다. 유구와 달리 지리적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일수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곧장 갈 수 있던 것이다. 백준의 사행시를 모은 『벽림음관초존』에 보면 당시 원접사 조병현(趙秉鉉, 1791-1849)과 차비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과의 시 창화 한 내용이 담겨있다. 실제로 조병현과 이상적의 문집에도 백준과 시를 주고받은 내용이 보인다. 공식 활동이 길지 않았던 탓에 조선의 인사와 교분을 쌓거나 종이 또는 부채에 글씨를 써 주는 등의 활동을 할 만한 여유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가는 사행은 유구보다 더 짧은 시간에 다녀올 수 있었는데, 이는 한쪽이 해로였던 데 비하여 다른 한쪽은 육로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청대 사절에게 있어서 조선은 다소 원거리의 여행이고 유구는 장거리의 여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나 싶다.

목차

1. 머리말
2. 이정원·백준의 파견과 그 규모
3. 사행 노정과 영접의례
4. 맺음말
참고문헌
[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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