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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정수 (건국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62輯
발행연도
2017.4
수록면
5 - 36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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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규는 혜종 대 두 차례나 모반을 꾀하다가 정종이 즉위 후 제거한 인물로 『고려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모반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충주 유씨 세력의 후원을 입은 정종 측의 활동과 상충되고 있어 기존 그의 모반 관련 기록과 해석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왕규의 난을 재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후삼국간 전쟁과 통일 과정 중 광주 양근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함규는 태조 휘하에서 정치적 성장을 꾀하면서 광주의 유력 세력으로 자리 잡아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납비하였고, 태조의 유언을 받드는 고명대신까지 되었다. 동시에 혜종에게도 딸을 보내 그 후원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정종 측은 태조 대 공신을 대표하는 왕규로 인해 왕권 장악이 어려워지자 그와 박술희 등 혜종 후원세력의 분열과 왕규의 제거를 동시에 꾀하였다. 그리고 왕식렴을 끌어들여 혜종 훙서와 함께 정종은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왕규의 난은 모반보다는 혜종 왕실의 보호를 꾀한 왕규 측과 정종세력의 갈등과정이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왕규의 난은 왕규가 외손인 광주원군을 옹립하려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정종이 집권하면서 광주세력의 약화 및 고명대신으로 상징되는 태조 공신세력에 대한 정리의 성격이 있어 이후 정종과 광종의 왕권 강화로 이어지는 계기성을 띠었다 여겨진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나말려초 광주와 왕규
Ⅲ. 왕규의 등장과 활동
Ⅳ. 왕규의 난과 죽음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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