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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朴現圭 (順天鄕大學校)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38輯
발행연도
2017.3
수록면
143 - 165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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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수군 장수 張良相이 한반도에서 활동한 행적과 유적에 대해 고찰했다.
장양상은 당초 정유재란 초기 명 군부가 대규모 수군을 파견하는 작전에 따라 한반도에 들어올 계획이었으나, 사실상 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선조 32) 5월에 수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 후 鰲川의 忠淸水營, 南海의 南海倭城 등을 거쳐 부산 해역으로 나가 일본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방어하는 작전에 나섰다. 1599년(선조 32) 10월에 명군 철수 계획에 따라 수군을 거느리고 귀국 해로에 나섰다가 계절의 영향으로 한동안 황해도에 머물었고 이듬해 여름에 한반도 해역을 벗어나 중국 대륙으로 들어갔다.
1599년(선조 32) 10월에 남해 船所 바닷가에 명 수군의 전승기념비 성격을 띤 <東征磨崖碑>를 세웠다. 장양상이 <동정마애비>를 세운 목적은 한편으로 명 수군이 세운 위업을 만방에 널리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도 명 수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는 숨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동정마애비>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釜山平倭碑銘>이 있다. 조선 실록사관은 <부산평왜비명>이 실제 공적과 어긋나고 헛된 명성만 추구한다고 비판을 가했다. 18세기 이후에 조선 인사들이 행한 <동정마애비> 평가는 反淸崇明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한반도에서 張良相의 군사 활동
Ⅲ. 南海 船所에 새긴 張良相의 마애비
Ⅳ. 결론
【參考文獻】
〈Abstract〉

참고문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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