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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야마다 후미토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87호
발행연도
2017.9
수록면
295 - 333 (39page)
DOI
10.37331/JKAH.2017.09.87.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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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성덕왕대 신라와 일본의 관계와 735년 신라가 일본에 대해 자국을 ‘왕성국’이라 표방한 사건의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8세기에 들어와 신라와 일본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는 701년 일본에서 「大寶律令」이 제정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 측 사료는 율령법의 이념에 입각하여 일관되게 신라를 朝貢國이라 서술했다. 「대보율령」 제정은 일본 율령법의 이념이 실제 양국 간의 외교에 서서히 영향을 끼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720년대 이후 양국 간의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면서 일본이 신라에 군사를 일으키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735년에 이르러 일본 平城京에서 자국이 ‘王城國’임을 표방했다. 이 배경에는 720년대에 들어와 신라가 일본을 비롯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당 지향적 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신라의 이러한 움직임은 발해를 경계하고 있던 당의 외교 정책과 맞물리고, 730년대에 들어와 당과의 관계는 군사동맹을 맺을 정도로 견고해졌다. 734년 초에 신라왕이 당으로부터 寧海軍使로 책봉된 것은 신라 주변의 바다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은 것으로 신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로써 신라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성국’임을 표방하게 되었다. ‘왕성국’은 ‘王이 거주하는 城이 있는 나라’로 당으로부터 인정받은 ‘諸侯王’의 존재를 강조한 표현이다. 당을 모방하여 율령국가 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던 일본은 신라의 ‘왕성국’ 표방으로 인해 신라 사신을 京에서 맞이할 수 없게 되었다. 즉 신라는 ‘왕성국’ 표방을 통해 일본에 대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 내에서 자국의 우위성을 확고히 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성덕왕대 전반기의 대일관계
Ⅲ. 외교정책의 변화와 ‘王城國’
Ⅳ. ‘王城國’ 표방의 정치적 함의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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