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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성석 (서울시청)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97號
발행연도
2018.3
수록면
37 - 6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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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인 1144년경 제작된 허재 석관에는 한반도 최초의 인신수관형 십이지 도상이 사신도와 함께 등장하였다. 인신수관형 십이지 도상의 갑작스런 등장은 당시 고려의 국제교류 상황, 그리고 이에 따른 외래 문화예술의 유입 양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송에서 관방도교와 관련 법식이 고려로 유입되었는데, 곧이어 도관인 복원궁이 건립되고 다양한 성수신이 초제를 받으며 숭상되었다. 이에 중국의 구체화된 도교신앙 체계가 고려 전통신앙과 습합하면서 장의미술에도 십이지 개념을 아우르는 도교적 우주관이 반영될 수 있었다. 1125년에는 요가 멸망하면서 거란인들이 대거 고려로 이주하였는데, 이에 고려의 묘지석과 석관에는 거란인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요대 장의미술에서 볼 수 있었던 문양과 도상들이 새겨지기 시작하였다. 허재 석관의 십이지 도상 역시 요나라 무덤의 묘지석에 새겨졌던 인신수관형 십이지 도상에서 영향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그려진 수락암동 고분벽화는 인신수관형 십이지 도상이 표현된 최초의 고려 고분벽화로, 허재 석관에 표현된 바 있는 십이지 도상과 사신도의 조합이 벽면에 대형화되어 그려져 있다. 이전까지 인물상별 십이지 동물의 비정에 혼란이 있었는데 이는 초기자료인 『朝鮮古蹟圖譜』의 오류 때문이었고, 본 논고에서는 이를 바로잡아 북벽의 중앙에 위치한 십이지를 子像이 아닌 卯像으로 비정하였다. 수락암동 고분벽화의 십이지 도상이 드러내는 뛰어난 회화적 풍모는 동시대 요·송대 고분벽화와 비교해보아도 그 격차가 완연하다. 이에 武宗元의 朝元圖와 이를 계승한 원대 영락궁 도관벽화와의 비교를 통해 수락암동 고분벽화 십이지 도상의 회화적 연원을 북송대 도교 인물화로 추정하였다.
고려 말기 조성된 공민왕릉에도 인신수관형 십이지 도상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이전까지 고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없었던 정면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방색의 사용에서는 고려 말기 유입된 성리학적 오행론의 대입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해 본래의 도교적인 의미를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1456년에 조성된 원주 동화리 노회신묘의 벽화를 함께 살펴보았는데, 노회신묘의 십이지 도상은 사신도와는 다른 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사용되지 않은 석실에는 사신도만 표현되어 있을 뿐 십이지 도상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이에 따라 노회신묘 십이지 도상은 장례의 마지막 단계에서 부장품을 삽입하듯 그려 넣어진 것이라 판단되며, 이에 벽화 제작의 절차와 방식에서 유사성이 뚜렷한 공민왕릉 벽화의 십이지 도상 역시 장례물품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삽입되었거나 혹은 유교식 장례절차 속 일종의 의례행위로서 그려졌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 人身獸冠形 십이지 도상의 연원
Ⅲ. 수락암동 고분벽화 십이지 도상의 배치와 회화 양식
Ⅳ. 공민왕릉 벽화 십이지 도상의 의미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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