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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손태도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 제53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229 - 305 (7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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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고 하는 동학의 교리(敎理)는 조선과 같은 상하(上下)의 중세적 신분구조 사회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사상이었다. 이러한 절대적 인간관에 의한 사회적 평등사상에 상층 양반의 지배구조 하에 있던 일반 평민들이 크게 호응했겠지만, 이보다도 더 감격한 사람들은 당시의 최하층에 있던 일반 천민들이었다. 이러한 사실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천민들 중 동학농민혁명에서 특히 주목되는 사람들이 광대집단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래 하나의 특수 신분 집단으로 내려와 ‘계급내혼(階級內婚)’을 통해 그 수가 많아져 조선말에는 수만 명 이상에 달했다. 이들은 관청에 기본적으로 악공 · 광대의 역을 하며 조선 후기에는 상당수가 중앙의 5군영의 취타수나 지방의 병 · 수영의 취타수와 같은 군악대들로 활동했다. 고종 (高宗) 연간에는 이들만으로 각 도에 난후군(欄後軍)이란 특수 군대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군사의 일에 밝았던 것이다. 또 이들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각 군(郡)들에 있었던 재인청(才人廳) 등과 같은 단체들을 통해 지역 단위의 조직을 갖고 있었고, 중앙의 산대희 같은 국가 단위의 행사를 위한 전국적 조직도 갖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솟대타기, 줄타기, 땅재주 등과 같은 기예들을 하였기에 몸이 날랬고, 각종 대중적 행사들에 참가하였기에 눈치도 빨랐다.
특히 이러한 광대집단 사람들 중 악공 · 광대이기만 한 경기이북의 재인촌 사람들과 달리,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 등지의 무부 · 악공 · 광대였던 경기이남의 화랑이집단은 기본적으로 무속 집단과 같은 종교집단이었기에, 역시 종교 계통인 동학에 보다 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현장에서 이들 광대집단 사람들은 분명 문제적 집단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자, 일부는 관군의 진압군이 되었고, 상당수는 동학군의 주전투부대원들로 활약했다.
광대집단 사람으로 실제 동학군에서 주된 역할을 한 사람들로는 1894년 초 1차 봉기 때 동학군의 선봉대장을 한 홍맹철(洪孟哲, 1830~1894, 4, 28.) 홍맹철의 아들로 1 · 2차 봉기 때 손화중포(包)에서 광대부대 대장을 한 홍낙관(洪珞寬, 1850~1918, 후대의 호적명은 홍종근(洪鍾謹)) 역시 홍맹철의 아들로 손화중포에서 지도적 인물로 있었던 홍계관(洪桂灌, ~1910)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홍낙관은 나중에 십만 부대를 이끈 동학군의 ‘여러 우두머리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었다.
이들 홍맹철, 홍낙관, 홍계관 등은 전라도 고창 출신인데, 고창에는 판소리광대 후원가 신재효 (1812〜1884)가 있어, 당시 고창에 많이 모여 있던 판소리광대들을 비롯한 많은 광대들이 이들의 동학농민혁명 때의 활약에 한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기간 동학군에서의 이들의 남다른 활동들로 광대집단 사람들이 동학군 쪽으로 많이 몰렸고, 이것이 동학군의 전투력을 높이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이들 외에도 홍낙관의 동생 홍응관(洪應觀, 〜1894), 사촌 홍한관(洪汗觀, ~1894), 구례의 임정연(任定然 혹은 林定然 혹은 林正然, ~1894), 흥덕의 김도순(金道順, ~1894) 등도 광대 집단 사람으로 동학농민혁명 기간 일정한 활동들을 했다.
동학농민혁명에 실패한 뒤, 체포된 홍낙관은 다행히 사형(死刑)은 면했다. 이후 그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체포되지 않은 홍계관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 후 최대 사건인 1898년 고부, 흥덕, 무장, 고창 일대의 영학당(英學黨) 봉기에도 관계했다. 이후에도 이들은 부안군 변산에 피신해 살며 동학 계통의 신앙생활을 하며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단체 활동은 이후 그곳에서의 아들 세대들의 동학 이후의 민족종교의 한 일파인 증산교단(甑山敎團)에서의 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홍낙관의 고창 연고지는 ‘고창의 접주는 대성(大成) 홍낙관’(『봉남일기(鳳南日記)』),‘자칭(自稱) 대성수접주(大成首接主)’(‘첩보(牒報)’) 등에 비추어, 현재 고창군 고수면 인동(대성마을)으로 여겨진다.
동학농민혁명과 광대집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필연적 관계에 있었다.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조사, 연구들이 이뤄져야 한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전통사회 광대집단의 존재와 그 성격
3. 동학농민혁명 당시 광대집단의 활동
4. 홍낙관, 홍계관의 개인적 사실들
5. 오늘날, 홍낙관 · 홍계관의 활동을 돌아보며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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