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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김홍매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 박향란 (중국 광동외어외무대)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73집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307 - 325 (1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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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헌이(孔憲彝, 1808-1863)는 자가 서중(叙中)이고 호가 수산(绣山)이며 공자의 72대 후손이다. 공헌이는 한유(韓愈)를 좋아하여 자신의 서재를 ‘한재(韓齋)’라 하였는데 ‘한재’는 당시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의 교류의 장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진행된 모임은 여러 번 ‘한재아집도(韓齋雅集圖)’로 그려져 양국의 문인들 사이에서 감상되고 전파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재아집’에 참여한 조선 문인으로는 역관 이상적(李尚迪)이 있다. 1855년에 이상적은 처음으로 ‘한재아집(韓齋雅集)’에 참여하였는데 당시의 장면은 ‘한객아집도(韓齋雅集圖)’로 그려졌다. 그 이후 1857년에 조선 문인 안규(安圭)가 한재에서 모임에 참여하였을 때와 1861년에 이상적의 제자 김석준이 ‘한재’를 방문하였을 때 역시 ‘한재아집도’가 그려졌다. 또 1851년에 그려진 ‘한재청우도(韓齋聽雨圖)’ 역시 조선의 문인들과 매우 큰 인연이 있다. 당시 모임에는 원래 조선 문인들이 참여하지 않았으나, 1881년에 조선 영선사 김윤식(金允植)과 역관 변원규(卞元圭)가 중국문인들과 모임을 갖고 이 서화 작품에 글을 남겼다. 이로부터 ‘한재’는 공헌이의 생전에 한, 중 문인들의 교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공헌이의 사후에도 하나의 문화 상징으로 한, 중 문인들의 교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역관 오경석과 안규는 함풍 6년과 7년에 함께 ‘한재’를 방문하고 중국 문인들과 교유를 하였다. 그들은 한재에서 섭명풍(葉名灃), 왕헌(王軒), 주기(朱琦), 풍지기(馮志沂), 정조경(程祖慶) 등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런 문인들은 대부분 동성파에 속했는데 그들과 두 조선 문인과의 교류는 시와 그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한재’에서 진행된 이런 비교적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는 양국의 문화에 적지 않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시야와 정보에 한계를 가져다주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목차

1. 서론
2. 孔憲彝와 ‘韓齋雅集’
3. ‘韓齋’와 咸豐 7년 한중 문인들의 교유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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