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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갑동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90輯
발행연도
2019.4
수록면
83 - 115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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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의 선조는 원래 무송현의 향리였다. 그의 아버지 윤수평은 그가 3살 되었을 때에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윤택은 할아버지 尹諧에게서 글을 배웠고 자라면서는 고모부인 尹宣佐에게서 공부하였다. 충숙왕 4년(1317) 과거에 급제한 그는 연경으로 충숙왕을 찾아가 독대하면서 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다. 충숙왕은 공민왕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충숙왕 대에는 각종 관직을 거치면서 출세하였다. 西京의 判官을 비롯하여 副代言, 代言 등을 거치면서 왕명 출납과 인사 행정 업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충숙왕의 바램과는 달리 충혜왕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그는 소외되었다. 그 후 충목왕이 왕위에 올라 羅州牧使에 임명되었지만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충숙왕의 부탁대로 공민왕을 왕위에 즉위시켜야 한다는 글을 元의 中書省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그는 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러 정책에 대한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致仕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외가가 있는 금산에 기거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가끔씩 상소를 올려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한양 천도를 반대하였는가 하면 공민왕이 불교를 깊이 믿는 것을 비판하였고 백악에 궁궐을 짓는 일을 중지하라 건의하기도 했다.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공민왕은 그를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그만큼 공민왕과 윤택은 믿음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그러다가 공민왕 10년(1361) 政堂文學으로 다시 치사하였으며 공민왕 12년에는 다시 한번 贊成事로 치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공민왕 13년(1364) 錦州 즉 지금의 금산으로 돌아가 살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후 거기서 살다가 공민왕 19년(1370) 82세로 운명하였다. 금산에 살면서 그는 李穡의 아버지 李穀의 문집인 『稼亭集』 跋文을 쓰기도 하였다. 윤택의 아들 尹龜生과 그의 부인은 금산에 내려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소를 지키고 사당을 세워 선조들을 극진히 제사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윤구생의 아들 尹紹宗이 이곳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충숙왕, 충혜왕대 정치상황과 윤택
Ⅲ. 공민왕대 윤택의 정치활동
Ⅳ. 윤택의 치사와 금산 낙향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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