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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현숙 (원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목간과문자 제22호
발행연도
2019.6
수록면
197 - 220 (24page)
DOI
10.35302/wdis.2019.06.22.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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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2012년까지 679년 창건된 신라 사천왕사 터에서 4종의 비편이 출토되었는데, 3종은 각 1편, 1종은 5편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석질, 양식, 서체, 서풍이 동일한 다섯 비편이 사천왕사의 동서 귀부 중 한 곳에 세워진 ‘신문왕릉비’임을 증명했다. 다섯 편은 신문왕의 몰년인 ‘임진’을 기록해 건비 시기를 692년경으로 보게 한 ‘次壬辰’명, 신문왕의 十德을 기록한 ‘無窮其德十也’명(2편), 비문 후반에서 신문왕을 칭송하는 운문체의 시인 銘辭의 시작을 알리는 ‘銘曰’명, 이들과 정간의 양식, 필법과 각법이 같은 ‘鏘’명이다. 또 ‘신문왕릉비’의 전액 또는 그 연습용으로 추정되는 ‘之碑’명의 필법이 무열왕릉비의 전액과 일치함도 밝혔다.
‘신문왕릉비’는 왕의 몰년인 임진년(692) 이후의 효소왕대(692~702)에 어린 왕 대신 섭정한 신목태후가 남편 신문왕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700년에 죽은 신목태후가 692~699년 사이에 세웠을 ‘신문왕릉비’는 당연히 선대인 무열왕과 문무왕의 능비 양식과 서풍을 따랐을 것이다. ‘之碑’명은 ‘신문왕릉비’ 비액이 〈무열왕릉비〉 전액을 따랐을 가능성이 큼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신라 중대(654~780)의 시작인 3왕, 즉 제29대 무열왕, 제30대 문무왕, 제31대 신문왕의 능비가 이어서 건립된 것이다. 자신의 치적이 없는 제32대 효소왕을 건너뛰고 대신 ‘신문왕릉비’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왕 못지않은 공적을 쌓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묘비, 그리고 제33대 성덕왕의 능비를 더한다면 통일기를 맞이하여 왕권을 강화한 7~8세기 신라 중대에는 능묘비가 왕권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대의 다섯 능묘비 가운데 ‘신문왕릉비’는 신라 중대 능묘비의 맥을 이어 준다는 점에서 그 존재 가치가 상당하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사천왕사의 내력과 출토 비편 분류
III. 신라 능묘비의 양식과 서풍
IV. 다섯 비편을 ‘신문왕릉비’로 보는 근거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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