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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영범 (대구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7집
발행연도
2019.08
수록면
179 - 238 (6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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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관내 최초의 한인 군사조직으로 1938년에 창설된 조선의용대는 대적전투가 아닌 정치선전 공작을 주 임무로 부여받고 대적선전대 역할에 치중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차 자료들을 다시 검토해보면, 조선의용대는 1939년 초부터 1940년 상반기까지 화중 · 화남의 4개 전구에서 중국군을 도와 선전공작을 수행하는 중에도 전투참가 기회를 최대한 얻어내며 전투요원 역할을 자진 수행하고 있었다.
1939년 가을부터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자체무장에 의한 전투부대화와 적후공작이 향후의 발전방향으로 제시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봄에 일부 병력을 뤄양으로 보내 화북에서의 대적공작 가능성을 탐색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추진되어간 화북행 기획은 1940년 11월 확대간부회의에서의 공식 결의로 추인되고, 1941년 상반기에 3개 지대 전체의 뤄양 집결과 황하 도하로써 실행되었다.
화북으로 건너간 의용대 병력은 중국군사위에 보고되고 승인받았던 예정진로와 다르게 태항산의 팔로군 항일기지로 들어갔다. 교차검증의 방법으로 여러 자료를 대조하며 검토해보면, 그것은 총대장 김원봉의 정치적 의사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북상 의용대의 중간 기착지 뤄양에서 중공계-급진좌파 대원들이 새로 제기하는 요구와 논리에 따라 행로조정이 기해진 때문인 것으로 추론된다. 그로부터 일부 통설의 오류와 좌·우 편향을 교정할 필요가 같이 제기된다.
태항산으로 들어간 ‘화북지대’의 대적활동은 직접전투가 아닌 무장선전 공작으로 집중되었고, 본래의 포부이고 약속이며 예정진로이던 동북진출은 계속 유예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고려와 동북지역의 항일정세 악화가 같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은 팔로군과의 밀착 및 합작으로 그 의미가 축소 · 변질됨과 아울러 충칭 잔류 본대의 소멸이라는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진정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목차

1. 문제 제기와 설정
2. 화중 · 화남 전선에서 조선의용대의 전투(참가) 실적
3. 조선의용대의 북상항일 추진과 화북진출 결정
4.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항일근거지 진입과 화북에서의 전투경험
5. 요약 및 결론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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