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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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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0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01 - 13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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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이 글은 7세기 신라의 내외부의 변화에 따른 報德國의 생성과 解體과정에서 나타나는 신라의 양면적인 지배정책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 故地에 남은 유민에 대해 당과의 전투를 직접 지원하거나, 安勝을 전면에 내세워 여타의 고구려 유민 세력을 統制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안승 집단을 金馬渚에 安置함으로써 이 지역의 안정적인 지배를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 유민을 견제하였다. 나당 전쟁기인 675년에 신라가 당에 보낸 謝罪使는 비록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만, 674년에 삭탈되었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675년의 사죄사는 안승이 報德王에 책봉된 것을 당의 침공명분을 稀釋시키는 용도로 보덕의 의미를 활용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신라에게)報德’이라는 뜻이었다. 나당전쟁을 앞두고 신라는 金馬渚의 고구려 유민 집단에게 신라에 거주하는 구성원으로써 당과 대적해야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었다. 679년 당의 서역전선이 안정세로 돌아서면서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문무왕은 耽羅를 경략하고, 王京을 중심화하려는 기획 하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하였다.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金欽突을 숙청하고, 집권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안승을 진골 귀족으로 삼았다. 나아가 684년에 발발한 報德城民의 난을 진압하면서 보덕국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보덕국이 가졌던 유효한 성분들을 지방에 대한 정비와 九誓幢의 개편에 활용하며 고구려 유민의 역량을 흡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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