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영(1850~1927)은 한국 근대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1905년에 일본이 서울에 헌병사령부를 세우려는데 대해 저항해서, 한국의 외교와 海關 주권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중국으로 망명하고, 이후 22년간 중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의 후반기의 삶은 다양한 방면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金澤榮과 兪樾의 교류는 바로 1905년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2년 반 동안에 다섯 차례 만나게 되었다. 즉, 1905년 5월부터 시작되어 1907년 12월에 兪樾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兪樾(1821~1907)은 浙江의 進士로써 뛰어난 학식으로 曾國藩의 평가를 받았으며, 翰林院編修 및 河南學政을 지냈다. 관직을 떠나서는 일생동안 고증학과 시문을 연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兪樾은 후반기에 蘇州에 은거하면서 멀리 日本․韓國의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金澤榮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金澤榮이 중국으로 망명하려할 때 兪樾의 협조는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兪樾이 金澤榮의 망명 계획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적극 지지하였다. 그들의 만남은 수준 높은 문화적 교류였고, 유월은 적극적으로 張謇 등의 중국학자들과 협력하여 마침내 김택영의 망명 계획을 실현시켰다.
金澤榮이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나 上海로 가서 張謇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는 마침내 南通을 선택하였다. 그는 문화 환경과 중국학자들과의 교류를 더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중국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는데, 江蘇의 張謇(1853~1926)을 대표로 하는 南通 학자들은 兪樾과 嚴復 등과는 다른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즉, 계속 학자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김택영과 張謇의 관계는 1882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張謇은 淮軍將領 吳長慶을 따라 임오군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 이때 吏部參判 金允植의 소개로 金澤榮과 알게되었다. 그리고 1905년까지, 두 사람의 교류는 23년이나 되었다.
金澤榮과 兪樾의 교류의 원인은 전통 학문을 통한 두 사람의 뜻이 일치하였던 데 있었다. 중국과 한국의 뛰어난 학자였던 두 사람의 교류는 수준 높은 문화교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요인은 양국간의 공통된 역사적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택영과 유월의 교류는 망명 계획을 세울 때부터 시작되었기에 순수 학문적인 만남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한국과 중국의 오랜 우호관계에 따라, 그리고 일본의 침략을 맞아 공동 대응해야하는 현실 상황에 따라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金澤榮은 남통에 거주하는 동안, 중국학자들과의 문화 교류를 지속하면서 한국의 역사․문화를 연구하였다. 그의 저작에는 강렬한 反日의 愛國精神이 감춰져 있었다. 깊은 儒學의 학문과 뛰어난 문장력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었고, 중국 학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택영을 높이 평가한 중국학자로는 兪樾, 張謇, 嚴復과 梁啓超 등이었다. 그는 중국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학문적 교류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